
김원실 ‘자연의 생명력’
실내장이 빠져나간 곳곳에는 먼지뭉치만이 굴러다닌다.
이삿짐 박스를 끌고 다닌 자리마다 폐허의 달콤한 냄새
먼지투성이 펜들을 배낭 속에 쓸어 넣는 동안
제발 그 가구만은 그대로 놓여있길 바란다는 듯
미미한 기척, 이미 책들이 빠져나간 아이보리빛 책장 뒤에 숨어
거미는 조그만 배로 비밀의 필사본을 잔뜩 뿜어내었다
내가 가느다란 필선같은 환상을 따라가는 동안
어둠 속을 바삭이며 자신만의 수사학으로 채우던 공간
그렇게 부드럽고 슬픈 말의 날개는 느껴본 적이 없다
거미줄은 책장 높이만큼 올라가려 했는지도 모른다
커튼을 걷고, 한 모금 바람을 삼킬 때마다
거미는 간혹 날아 들어온 나방을 삼켰을지도
마른 후레이크를 주워 먹으며 글을 쓰던 고적한 시간
나는 너무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때로 시끄럽게 울려대던 음악이 방해되진 않았는지
코맹맹이 심야의 통화소리가 우습지는 않았는지
시끄러운 짐꾼들의 발소리가 떠나가는 동안에도
비밀에 감싸인 방을 홀로 지키는 거미
모르겠다, 누가 이 방의 주인이었는지
인간이 거미란 말을 사용하듯 그는 나를 무어라 불렀는지
마지막으로 난방기를 끄고, 조심스레 물러나오는 동안에도
나는 너를 위해 문을 여닫는 하인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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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하면서 책장 뒤에서 발견한 거미를 통해 시인은 공생의 작고 신비한 비밀을 발견한다. 방의 주인이 결코 반기지 않았을 작은 거미에게 책장 뒤의 공간은 전 세상이었다. 거주지였고 소음이었고 텃밭이었고 또 놀이터였다. 주인은 거미에게 어둡고 풍요한 하나의 커다란 우주를 제공했던 것이다. 빈 방은 이렇게 새로운 생각의 공간을 제공하고, 누가 주인이고 누가 하인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방은 온전히 거미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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