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랜드 한인사회의 거목이셨던 이영희 박사를 추모 하면서 그분이 평소에 한인사회를 발전시켰던 업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이민 초창기서 부터 그분과 함께 일을 하면서 내게 주신 주옥같은 많은 충고들이 오늘날 나 또한 한인사회에 오랫동안 몸담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다.
메릴랜드한인회장을 역임하셨고 봉사센터를 창립하시고 버스 정류장에서 노인들이 모여 서성거리시는 것이 안타까워 노인회를 창립하셨다. 많은 사람들의 비난도 있었지만 오로지 봉사하고 싶어 하시는 마음을 나는 곁에서 늘 보아왔다.
또한 메릴랜드한인의 날 행사를 최초로 주관하시어 한국과 한인사회를 미국에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셨다.
일제시대 당시 한국인 최초의 변호사 딸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던 중 8.15해방이 나던 해에 친일파로 몰려 아편소굴을 전전하다 미국으로 피신을 오게 되셨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나에게 늘 정치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봉사에만 늘 기쁜 마음으로 전심을 다하라고 하신 말씀이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언제나 여성스러우면서도 정의감이나 정력이 많으셔서 1988년 메릴랜드한인회장 선거 참모장을 하실 당시 오션시티까지 늦은 밤 운전을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무료진료를 다니시면서 행복해 하셨던 일, 고운 목소리로 ‘이영희 소프라노의 밤’을 가지셨던 일, 유명한 화가인 여동생과 함께 그림을 그리셨던 일, 장사하는 사람들이 의사인 당신보다 현금을 잘 쓰니까 나도 돈 많이 벌어 쓰고 싶으시다고 현대 프라자를 사셔서 명동칼국수를 차리셨던 일, 인생을 마감하기 전에 책을 쓰고 싶으시다고 하시면서 ‘감사하여 행복하다’를 발간하셨다. 또한 2년 전에는 메릴랜드한인회에서 그분의 공로를 기억하는 ‘자랑스런 한인상’을 드렸다
경력으로는 메릴랜드한인의사협회회장, 볼티모어 50개 소수민족협의회 회장을 역임 하셨다.
1988년에 그동안의 신세도 많고 해서 환갑잔치를 차려 드렸는데 그때는 앞으로 20년만 살고 싶다고 하셨다. 얼마 전 문병을 갔을때 20년 더 많이 살고 계셔서 행복하다고 하셨다.
자제분들이 멀리 떨어져 사셔서 노년에는 외롭게 오로지 남편의 간호를 받고 지내셨지만 언제나 깨끗한 모습만 보이고 싶으셔서 사람들의 방문을 꺼려하셨다.
나의 인생의 멘토 이셨던 이영희 박사님을 추모하면서 언제나 밝으신 웃음으로 대해 주셨던 지난날들이 다시 올 수없는 안타까움으로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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