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선 <전 한인회 회장>
벽난로 밑에 세워둔 사각형의 나무시계는 결혼할 때 아내의 친구가 선물해 준 것이다. 이삿짐에 끼어 미국까지 따라왔으니, 비록 보잘 것 없는 물건이라 할지라도 우리가족과는 인연이 참 깊다. 그동안은 잊지 않고 태엽만 감아주면 장식장 위에 놓인 디지털시계가 가리키는 숫자를 숨 가쁘게 따라가 주었는데, 올해 초부터는 그마저도 힘겨운지 자꾸 늦어져 시계를 보면서도 계산을 해야 했다.
시계는 정확한 시간을 가리킬 때 까지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는데 반론의 여지가 없지만, 이것도 일상이 되고 보니 그 불편함에 나도 모르게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다. 때로는 기다리던 TV 방영프로그램의 앞부분을 놓쳐 아쉽게도 만들고, 느긋하게 있다가 약속시간을 코앞에 두고 허겁지겁 나가게도 한다.
시계로서의 수명이 다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가족의 지난 시간을 모두 지켜본 물건이라는데 의미를 두니 비록 색이 바래고 모양이 틀어져 볼품은 없어졌을 지라도 차마 버리지 못하겠다. 살아보니 한걸음 모자라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다는 것을 알겠다.
돌이켜보면 늘 시간에 매어 살았다.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또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것은 습관이라 하더라도, 깨어 있는 시간에서의 일상생활 역시 만들어 놓은 울타리에서 살았었다. 그 울타리를 조금만 벗어나도 조바심에 마음을 졸여야 했다. 시간의 노예가 따로 없었다. 서머타임제가 실시된 날부터는 앞당겨진 시간에 적응하는데 또 며칠이 걸렸다. 이렇게 시간이 바뀌어 어색해진 리듬과 마주하는 일상에서 한걸음 늦은 시계는 잠시 숨을 고르게 했다. 비로소 시간의 주인이 된 것이다.
독일에서는 50세가 되는 생일에 손목시계를 선물하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지난 시간의 헌신에 대한 따뜻한 격려이자,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소중히 쓰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도 예로부터 결혼식이나 입학, 졸업식 등 중요한 순간에 시계를 선물하곤 했다. 시간이 흘러 사랑과 의미가 퇴색하더라도 그 시계가 가리켰던 시간의 주인으로서 순수했던 시절을 상기시키라는 의미일 것이다.
잘 알려진 이야기로, 마밀린 먼로가 케네디에게 선물한 명품 시계는 그 상징성이나 전해지는 러브 스토리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가격에 경매되어 화제가 되었었다. 케네디의 외면으로 단 한 번도 그의 손목에 채워지지 못한 채로 세상에 나옴으로써 두 사람이 공유한 시간이 없는 시계는 그 이상의 의미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주일에는 뉴욕 가는 길에 있는 인근의 작은 성당을 찾았다. 얼핏 보아도 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모습이라 그동안 눈여겨보며 지나쳤던 곳이었다.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는 물론이고, 두 시간 가까이 엄숙한 중세의 예절에 잘 훈련된 복사들의 작고 섬세한 손끝 움직임조차도 예사롭지 않았다.
라틴어 미사가 그동안 우리가 익숙했던 전례보다 엄격하고 세분화 되어 따라가기가 바빴으나, 세기를 넘어서서 정지된 듯 재연되는 그 모든 순간이 한편의 움직이는 성화를 보고 나온듯한 감동을 주었다. 그들이 받아들인 신앙과 시간을 넘어선 세상 읽기가 어떤 의미인지 오랫동안 묵상하게 한 좋은 경험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지루한 겨울이 길어진 한줌 햇살에 떠밀려 봄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며칠 전부터는 얼음 틈으로 조금씩 흐르는 물길 끝에서 쌓인 눈을 밀쳐낸 수선화가 싹을 내 놓았다. 목련도 겨우내 덮여있던 눈꽃을 벗어 버렸다. 순백의 꽃을 피워낼 날이 멀지 않은 듯 봉오리가 제법 단단하다. 고장 난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따라 걸으며 눈 밑에 숨어 있는 새싹에게 말을 건다. 천천히, 천천히….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