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절을 맞이하여 페어팩스에서 일제시대의 작가 심훈의 특별전시회가 열렸다. 고교 동창회의 일을 하는 후배가 나에게 심훈 작가가 학교 선배가 되기도 하고, 또한 존경할 만한 분이니 꼭 들려 보라고 권해서 갔다.
사실 그 분을 저항 시인이자 계몽 작가라는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이었고, 그저 유품 몇 점 전시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을 것 같았으나 그래도 후배의 부탁이 하도 완곡하여 별 기대 없이 찾아갔다.
나는 작가 심훈의 출생이 1900년도라 작가로서 그 시대 분들의 공통된 점이 특이하여 어떤 분일까하는 나 나름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1919 년 3.1 독립만세 운동에 가담하고, 그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이 발간되면서 국민들 계몽 차원에서 국민들을 일깨우는 소설을 연재하고 하는 일련의 모습 말이다. 다만 한 가지 그분이 일찍 요절을 해서 상록수 소설 이후 무슨 전시물을 남길만한 것이 있겠느냐하는 생각도 했었다.
전시장에서 나는 심훈 작가의 3남 되시는 심재호 선생으로부터 안내를 받으며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유명한 시 ‘그날이 오면’을 일제가 검열하면서 붉은 줄로 표시하고 ‘삭제’라고 쓴 원본, 옥중에서 모친에게 쓴 편지,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날 감격하여 쓴 시 등 손때가 묻은 자료와 당대에 발간된 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아직까지 보존되어 온 심훈 작가가 상록수를 집필 할 때에 기거하던 당진의 집 필경사 사진, 보물급이라 할 수 있는 한글 궁체의 명필 갈물 이철경 씨의 ‘그날이 오면’ 붓글씨 등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믿기 어려울 만큼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고맙다는 인사를 심 선생에게 드리면서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근현대에 유명인들의 유품 전시회가 과연 몇 분이나 있었나, 그리고 있었다면 그 내용이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심훈 작가의 이 전시회와 비견할 정도는 없는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유명인들의 출현 못지않게 그 분의 발자취를 보존하고,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다면 그 의미가 반으로 줄어든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심재호 선생이 4만점이 넘는 심훈 작가의 유품을 수집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연세가 80세 정도가 되기까지 혼신을 다하여 수집 보관 하신 바로 그 분이 더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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