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정치인이나 공무원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있다. 처신 잘하고 양지만을 돌아다니는 정치인이나 공무원은 어느 수준까지는 출세의 가도를 달리지만 자신의 운명을 가름할 결정적인 기회에서는 탈락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고통은 자신을 생각하게 만든다. 아픔을 통해 인간이 성숙해지고 겸손해 지는 것이다. 양지만을 골라 다니는 정치인이나 공무원은 요령은 알아도 고통에서 오는 깨우침이 없다. 때문에 결정적인 기회가 왔을 때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지금 한국정계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완구 총리인준 파동은 양지에서 자란 정치인의 실수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신군부 시대에는 군부와 친해 삼청교육대의 경찰임원으로 있다가 경찰청장이 되었고, 김영삼 정권에서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김대중 정권에서는 JP계열에 줄서 집권세력의 햇볕을 쪼였다. 이회창씨가 대통령후보 물망에 오르자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겼으며, 노무현 정권에서는 반노무현 정서를 업고 충남도지사가 되었다. 세종시를 둘러싸고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결전을 벌였을 때는 박근혜편을 든 인연으로 박대통령의 눈도장을 받아 새누리당에서 원내대표가 되었으며 능숙한 솜씨로 야당과 힘든 타협을 이루어냈다. 그래서 박대통령으로부터 소통의 달인으로 점 찍혀 총리후보로 선택 받기에 이른 것이다. 체제 순응적인 처세술이 뛰어나고 양지만을 돌아다닌 정치인이다. 그런 그가 지금 결정적인 출세의 길목에서 말실수를 범해 스타일 구기고 낙마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가 며칠 전 기자들과의 식사자리에서 언론기관 간부에게 전화해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를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발언내용은 유신시대의 언론 통제를 연상케 한다. “말은 안 꺼내지만 내가 다 (언론사)윗사람들과 관계가 있어요. 어이 이국장 걔 안돼. 김부장 걔 안 돼(하면 기자는) 지가 죽는지도 몰라요. 어떻게 죽는지도 몰라”라는 발언은 기가 막힌 내용이다. 이건 분명히 기자들에게 겁주려고 자신의 위세를 과시한 유치한 망발이다.
말은 마음의 초상이다. 그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가치관을 대변한다. 오늘날 우리가 날마다 듣고 보는 부패와 비리들은 가치관의 상실이 그 원인이다. 이완구의원이 총리 자격미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고 보니 부동산투기, 논문표절, 황제특강, 그리고 본인의 병역기피 의혹 등 이후보가 평생을 특혜와 투기, 편법으로 살아온 정치인이라는 시민단체의 주장에 수긍이 간다. 국민 눈높이 정치, 소통의 정치 운운하는 그의 말이 그의 행동과 들어맞지를 않아 이중인격자처럼 보인다.
국무총리 인준은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 출석에 과반수 찬성이면 통과된다. 더구나 신임 야당대표 문재인은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이라 충청 대표세력인 이완구를 낙마 시키면 충청도 표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데 선거 때마다 충청도 표가 대통령 당선을 좌우한다. 그래서 문재인 대표가 여당이 이후보의 인준통과를 밀어 붙이면 눈감아 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완구 파동은 국회의원만을 설득해 해결될 단계를 넘었다. 그는 지금 국회의원 아닌 국민들을 설득해야 할 형편에 놓여있다. 여당과 야당이 적당히 합의해 인준안 통과를 밀어 붙이는 날엔 국민들의 분노를 초래하게 되고 이 분노는 내년 국회의원 선거로 연결된다. 국회의원에게는 총선이 생명이다. 그래서 여당 내에서 반발표가 나와 야당과 합세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이완구 후보가 박근혜 정권에서 네 번째로 낙마하게 되며 박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을 재촉하게 될 것이다. 한국정계에 이다지도 인물이 없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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