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일 SF서 별세
▶ 한인사회 구명운동… 10년만에 무죄 석방
미국 내 범 아시아계 민권운동의 효시로 기록된 ‘사형수 이철수 사건’의 주인공 이철수씨가 지난 2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1세.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미주 한인사회에서 ‘구명운동’의 물결을 일으키며 화제가 됐던 이씨는 지난달 18일 위장 이상으로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메리 병원에 입원한 뒤 의사의 수술 권유를 거부하고 2일 새벽 4시께 한 많은 삶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졌다.
1973년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복역하다가 한인사회 구명운동 등에 힘입어 10년만인 1983년 자유의 몸이 됐던 이씨는 지난 1992년 방화사건과 관련 입은 화상으로 수십 차례 피부이식 등 수술을 받으며 힘든 세월을 지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내다 LA로 이주해 일을 하기도 했으나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웰페어와 메디칼에 의지해 살아왔다고 지인들은 전했다.
■ 이철수 사건이란
1973년 6월7일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갱단원이 총을 맞고 사망한 사건과 관련, 아무 관련이 없었던 이철수씨가 목격자에 의해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종신형으로 복역하다가 또 다시 교도소 안에서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구명운동 등에 힘입어 풀려나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다.
이씨는 중국계 갱단원 살인혐의로 종신형을 받고 복역하다 1977년 교도소 운동장에서 시비를 걸어온 복역수 모리슨 니드햄과 싸우다 그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후 이씨의 사건을 접한 당시 새크라멘토 유니언지의 이경원 기자가 77년 판정에 의문을 제기한 탐사기사 시리즈를 쓰기 시작한 후 한인사회를 비롯한 범 아시안 커뮤니티의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1978년 당시 법대 졸업생이던 유재건 변호사와 당시 고교 교사이던 그레이스 김 전 한미연합회 회장 등이 주축이 돼 ‘이철수 구명위원회’를 구성, 다른 아시아계 인사들과 함께 1978년 6월17일 새크라멘토 법원에 이철수 인신구속 해제 신청을 했으며, 한인사회는 이를 위해 1982년 전국적으로 10만달러 모금 캠페인을 시작했다.
마침내 1982년 9월2일 샌프란시스코 법원에서 열린 재심에서 이씨에게 무죄평결이 내려졌고, 1983년 3월28일 샌호아킨 법원이 이씨에 대한 석방을 판결, 10년 만에 자유의 몸으로 석방됐었다.
한편 이씨의 영결식은 오는 9일 11시 샌부르노 여래사에서 엄수된다.
연락처 (415)203-3310(도리스 야마사키)
<홍남 기자>
이철수(맨 왼쪽)씨가 지난 2007년 4월 UCLA에서 본보 후원으로 열린 ‘이철수 사건’ 25주년 심포지엄에 참석했을 당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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