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으로 간 등산
등산로는 대부분 오르막길이다. 땀을 흘리며 정상에 올라 대자연의 풍광을 둘러보는 재미는 아는 사람만 안다. 그런데 엿새전 등산은 전혀 달랐다. 풍광은커녕 깜깜절벽이어서 사스콰치(설인)가 금방 달려들 것처럼 으스스했다. 오르막길이 아닌 평지였고, 공기가 음습해 땀도 나지 않았다. 산엔 갔지만 산위로 오르지 않고 산 아래 땅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할로윈 계절에 딱 어울리는 등산로라는 시애틀타임스의 안내 기사를 읽고 ‘스노퀄미 터널’을 찾아갔다. 지난 십수년간 뻔질나게 다닌 래틀스네이크, 트윈 폴스, 아네트 레이크 등 인기등산로를 낀 ‘아이언 호스(鐵馬) 주립공원 트레일’의 정점인데, 그동안 못 가봤다. 스노퀄미 패스 넘어 하야크의 906번 내리막길 옆에 붙은 터널 주차장이 넓고도 깨끗했다.
화창한 가을 날씨였지만 중세 성곽처럼 육중한 나무문이 달린 터널입구에 들어서자 이내 컴컴해졌다. 플래시가 없으면 장님이나 진배없다. 멀리 바늘구멍 만하게 보이는 빛이 반대편 입구이다. 2.3마일 거리다. 시멘트바닥의 발자국소리, 천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소리 외에는 적막강산이다. 휘파람을 불었더니 공명효과(에코)가 일류 녹음스튜디오 못지않았다.
터널 벽에 흰 페인트로 쓴 숫자가 계속 눈에 띄었다. 옛날 영화 ‘지구중심으로의 여행’이 생각났다. 모험, 스릴, 액션, 로맨스가 잘 배합된 쥘 베른의 동명 공상과학소설이 원본이다. 당대 최고 인기가수였던 팻 분이 제임스 메이슨 등 일행 3명과 함께 300여년 전 선대 과학자가 표시해 놓은 땅속 미로를 따라 지구중심까지 내려갔다가 돌아온다는 얘기였다.
스노퀄미 터널은 꼭 100년전에 뚫렸다. 중국 이민자 등 인간 두더지 2,500여명이 산 양쪽에서 파고들며 340톤의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키고 18만 입방야드의 돌과 흙을 파낸 후 약 15개월 만인 1914년 8월5일 중간지점에서 만났다. 일본에서 제작된 매머드 굴착기 ‘버사’가 동원된 시애틀 다운타운의 터널공사가 1년 가까이 답보상태인 것과 대조적이다.
스노퀄미 터널(50호 터널)이 개통된 건 이듬해 1월24일이다. 하지만 첫 승객들은 찬사 아닌 불평을 쏟아냈다. 석탄연기 때문에 숨을 못 쉴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검댕 묻은 몰골들도 가관이었을 터이다. 밀워키 철도회사는 1917년 전기와 증기를 혼용하는 하이브리드 기관차로 대체했다. 지금도 터널 곳곳에 변압기가 들어 있던 나무박스들이 남아 있다.
서북미 목재를 중부로 실어 나른 밀워키 철도(공식명칭은 ‘시카고-밀워키-세인트 폴-퍼시픽 철도’)는 한동안 시애틀-타코마 지역의 스키 마니아들을 하야크 스키 리조트로 수송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이 산간기차는 1934년 스노퀄미 패스를 넘어가는 국도(US Route 10)가 포장되면서 자동차에 밀리게 됐다. 현재의 I-90 고속도로는 1969년 개통됐다.
워싱턴주 정부는 밀워키 철도회사가 1980년 파산하자 주내 선로부지의 소유권을 인수하고 궤도를 거둬낸 뒤 ‘존 웨인 개척자 트레일’로 명명했다. 워싱턴주를 동서로 관통하는 유일한 산책로이다. 주정부는 또 이 트레일 가운데 노스 벤드에서 야키마에 이르는 110마일 구간을 아이언 호스 주립공원으로 지정했다. 주내 100여개 주립공원 가운데 가장 길다.
스노퀄미 터널도 기록이 있다. 세계에서 자동차통행이 금지된 가장 긴(1만1,890피트) 터널이다. 레이니어 산의 캠프 뮈어 등반거리를 웃돈다. 군대행진마냥 뚜벅뚜벅 걷다보면 중간쯤부터 실증이 난다. 마주치는 사람도 거의 없다. 혹시 박쥐가 있나 하고 플래시를 천장에 비춰보지만 깨끗하다. 50여년 전 영화의 팻 분처럼 빨리 동굴을 벗어나고 싶어진다.
밖은 별천지다. 테이블과 화장실을 갖춘 피크닉 뜰이 있다. 박쥐 아닌 블루 제이가 반겨준다. 그래닛, 맥클렐란, 반데라, 캐서린 등 고봉들이 둘러서 있다. 비오는 겨울철에 제격인 땅속 등산로이다. 특히 자녀들을 데리고 이곳에 찾아가 멋진 할로윈 추억을 만들어 주도록 권한다. 동네 밤길보다 무섭지만 훨씬 안전하다. 터널은 11월부터 5월까지 폐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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