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빈 여러분, 저기 공사하는 아름다운 소리가 들립니까? 아, 내 귀에는 마치 음악처럼 들리는군요. 저 소리를 사랑합니다. 돈을 연상시키는 소리죠!”
얼마전 백악관의 한 행사에서 이스트윙 건물의 철거 소음이 들려오자 트럼프가 이에 찬사를 보내는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참담함을 금할 수가 없다.
역대 미국 영부인들의 숨과 혼과 정신이 배어있던 백악관의 동관이 지난 10월20~23일 나흘 동안 완전히 철거돼 사라졌다. 123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건축물이 순식간에 파괴됐고, 주위 나무들도 다 뽑혀 나갔으며, 유명한 재클린 케네디 정원 역시 흔적도 없이 파헤쳐졌다. 셧다운 기간 동안 연방기관들이 모두 문 닫은 상태에서 전광석화처럼 벌어진 일이다.
그 자리에 3억 달러를 들여 999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연회장을 짓는다고 한다. 백악관의 3분의 1을 때려 부수고 파티장을 짓는다는, 이렇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는데도 미국이 조용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지난 7월 트럼프가 연회장의 건축 계획을 발표했을 때는 그 자체가 황당해서 반신반의했었다. 게다가 당시에 그는 “현재의 건물에 절대 손대지 않고, 기존 건물을 완전히 존중하는 방식으로 근처에 지을 계획”이라고 공언했었다. 하지만 석달만에 갑자기 돌변, 건축가들과 상의한 결과 부분철거도 아니고 완전철거 후 그 자리에 볼룸을 짓기로 했다는 것이다.
백악관은 트럼프 개인의 집이 아니다. 세계 최강국 권력의 상징이며, 역사적 건축물이고, 공공자산이다. 과거의 대통령들도 백악관 건물을 개조하거나 증축한 일이 있었지만 모두 전문가들의 자문과 협의를 거친 후 백악관 역사협회와 보존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추진했다. 특히나 워싱턴DC와 같은 특별지구에서 이렇게 중요한 건축물의 변경은 국립역사보존법(NHPA)과 국가수도계획위원회(NCPC)의 심사와 승인 등 많은 절차를 거쳐야하는데 백악관은 이를 하나도 거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월스트릿저널에 따르면 트럼프는 7월에 NCPC 위원들을 하루아침에 교체하여 12명 모두 충성파 공화당 인사들로 채웠다. 이 기관은 워싱턴DC의 공공건물과 기념물, 대형 개발계획 등을 심의하고 승인하는 감독기구인데, 셧다운 기간에 문을 닫은데다 위원들은 모두 아무런 반대의견을 내지 않았다. 심지어 새 위원장은 “우리는 건축에 관해서만 심의하지 철거에 대해서는 관할권이 없다”는 궤변으로 책임을 회피했다.
백악관은 1800년 처음 건립됐을 때 관저와 집무실이 함께 있는 본관 한 채만 있었다. 그러다 1902년 관저를 가운데 두고 양 날개처럼 건물을 확장해 대통령 집무실과 국정운영 공간은 서쪽별관(West Wing)에 두고, 동쪽에는 방문객들이 출입하는 테라스를 지었다.
이 테라스가 동쪽별관(East Wing)이 된 것은 전쟁시기이던 1942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지하에 대통령 비상벙커(PEOC)를 구축한 후 이를 덮기 위해 그 위로 2층 건물을 올린 것이 시작이었다. 그러자 엘리노어 루스벨트 여사는 이스트윙을 자신과 비서의 공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비공식적인 퍼스트레이디의 영역이 된 것이다.
1977년 로잘린 카터 여사는 이곳에 ‘영부인 집무실’을 공식적으로 창설하고 이듬해 법제화했으며, 자신의 스태프 18명에게 백악관의 다른 직원들과 동등한 임금과 지위를 부여하면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전문화했다. 이후 이스트윙은 웨스트윙에 못지않은 ‘부드러운’ 정치력을 발휘하는 공간이 되었고, 역사가들은 여성파워의 공간으로 보았다.
낸시 레이건의 ‘저스트 세이 노’ 마약반대 운동, 힐러리 클린턴의 건강보험 개혁안, 로라 부시의 아동문맹퇴치 운동. 미셸 오바마의 ‘레츠 무브’ 아동비만방지 캠페인, 질 바이든의 군인가족 지원사업이 다 이곳에서 잉태되고 추진되었다. 때문에 트럼프가 이스트윙을 때려 부순 것은 여성파워에 일격을 날린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정가에서는 멜라니아가 이스트윙을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트럼프가 부담없이 헐어버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취임 후 넉달 동안 백악관을 찾은 날이 단 14일뿐인 멜라니아는 1기 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공적활동을 하고 있지 않으며, 직원 숫자도 이전 퍼스트레이디들이 최소 20명이었던 것과 달리 5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녀는 이스트윙 철거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고 있다.
9만 스케어피트 규모의 볼룸이 들어선다면 백악관 건축물의 고전적 균형미는 크게 훼손될 것이다. 본관이 5만5,000스케어피트이고 웨스트윙은 그보다 작은데, 그 동쪽에 거대한 연회장이 붙는다면 클래식한 좌우대칭 구조는 사라지고 연회장이 본관과 집무실 공간을 압도하는 흉물스런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또한 건축 스타일과 인테리어가 어떨지는 안 봐도 뻔하다. 대통령집무실 실내장식을 온통 금박으로 바꾸고, 바로 옆의 서재를 트럼프 마가용품 기프트샵으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무식하게 돈만 처바른 천박하고 혐오스런 공간이 될 것이다.
트럼프의 임기가 아직도 3년 넘게 남았다. 이를 어떻게 견디냐는 탄식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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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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