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아버지 소리가 나면 난 이불 속으로 숨었다. 아버지는 술이 거하게 취해 대문 인근부터 크게 노래와 내이름을 부르며 들어오시곤 했다. 잠자는 척하는 나의 볼에 거친 수염을 이리저리 쓸던 그 까칠한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군수 장학금으로 당시 최고 인기인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대통령상도 수상한 훌륭한 교육자이다. "교육자의 자녀임을 잊지말라"고 마루 한가운데 크게 붙여놓고, 우리는 선생님 자녀라는 틀 속에서 누구나 다가는 오락실, 카페, 포장마차도 가면 큰일나는 줄 알았고, 남에게 뒤지면 아버지 망신이다는 분위기에 항상 1등을 해왔고, 각자의 분야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며 그렇게 교육자의 자녀로 성장해왔다. 어릴적 사람들이 집에 과일박스 등을 놓고 가곤 했다. 난 맛있는 것을 참 좋아했다. 언젠가 내가 혼자 있을 때 누군가 집에 큰 박스를 두고 갔다.
아버지는 그 속에서 흰봉투를 꺼내며 다시는 어른들 없을 때 아무것도 받지 말라며 박스를 도로 가져다주셨다. 난 어린 마음에 수북한 돈이 아까웠다. 그러나 지금 난 아버지가 보여준 그때의 모습으로 부정한 돈을 받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 한번은 아버지가 교장으로 계실 때 학부모들이 몰려와 어떤 선생님을 해고하라 했다. 아버지는 학부모들을 호통쳐 돌아가게 했다. 이후 일명 빽세다는 학부모가 교육부에 아버지와 선생님을 제명하라 압력을 넣고, 아버지는 교육부에 들어가 학교를 좌지우지하는 학부모의 월권과 권력에 흔들리는 교육부의 행동에 일침을 놓기도 했다.
아버지의 정년퇴임 때 한국에서 날고 긴다는 수많은 제자들이 명예퇴임식을 아주 거하게 차려드렸다. 그때 나는 교육자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 당시 선생님은 가장 존경받는 직업이고 엘리트들의 집결지였다. 그러나 그들이 퇴임할 시기엔 월급도 적은 기피직업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대쪽 같은 성품과 허물어져가는 교육계의 존엄성에 대해 한탄하는 평생 교육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빈방에 홀로 책만 읽으며 아버지는 물질에 사람이 종속되고 교육이 출세의 도구로 변화된 사회를 보며 무슨 마음으로 침묵하고 있는지... 어쩌면 지금 80, 90세는 문명의 격동기 속에서 인간성 상실이라는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바라본 산증인들이 아닐른지, 그들의 뒷모습만 바라보아도 마음이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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