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이 임기를 채운 뒤 물러나 상도동 집에서 필자와 인터뷰를 가졌을 때의 일이다. 자연히 화제는 새로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에 쏠렸다. 그런데 YS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그 친구는” “대중이 갸는(그 아이는)” 등으로 부르면서 화제를 이어갔다. 나는 전임 대통령이 후임 대통령에 대해 감정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좀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인터뷰 도중 YS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니 현직 대통령을 왜 그렇게 부릅니까? 더구나 김대중 대통령이 나이도 조금 위인 것으로 알고 있는 데요” 했더니 YS왈 “대중이는 입만 열었다하면 거짓말이야. 그 친구가 주장하는 나이를 어떻게 믿어? 그리고 정계입문은 내가 선배야. 내가 민주당 원내총무 했을 때 그 친구는 아무것도 아닌 국회의원이었지.”
그러면서 격한 어조로 DJ를 비난하며 위선자 취급했다. 왜 이렇게 YS가 격앙하는 가를 가만히 생각해 봤더니 아들 김현철 문제가 떠올랐다. 당시 유죄판결을 받은 아들을 사면해 달라고 주변에서 부탁했는데 DJ가 명쾌한 대답을 않고 미루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말은 같은 말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야 한다. 그곳에서는 유머가 되는 말이 이곳에서는 주책이 될 수 있다. 특히 나이 든 사람이 말을 막 하거나 술주정하면 그림이 안 좋다.
엊그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박근혜 후보를 일컬어 ‘칠푼이’라고 했다. 쇼킹한 평이다. 독설을 넘어 악담에 가까운 표현이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대통령입후보 인사차 상도동을 방문한 자리에서 YS가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사력을 다한다”고 말하자 김지사가 “이번에는 토끼(자신)가 사자(박근혜)를 잡는 격”이라고 대답한 모양이다.
그러자 YS는 “그건(박근혜) 사자도 아니다. 칠푼이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칠푼이는 칠삭둥이를 의미하며 사람이 좀 모자란다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언어다. 실실 웃으면서 바보스런 말을 늘어놓는 스타일의 사람이다. 박근혜는 오히려 너무나 칠푼적이 아닌 것이 취약점인 정치인이다. 그런데 왜 YS가 박근혜에 대해 그런 독설을 퍼부었을까.
아들 김현철씨는 새누리당 국회의원 공천에서 떨어졌을 때 “박근혜에게 속았다. 아버님(YS)은 실망을 넘어 분노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YS가 박근혜 후보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 지를 잘 설명해주는 표현이다.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평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공천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화풀이로 독설도 서슴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칠푼이’ 발언을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YS에 대해 실망하고 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 독설은 자만이며 교만이다. 85세 된 전직 대통령에게는 독설이 어울리지 않는다. 잘못하면 거꾸로 주책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더구나 민주투사는 인생말년에 자신의 이해관계나 정적관계를 떠나 우뚝 선 자리에서 무게 있는 말을 던지는 여유를 보여야 한다. 만델라를 보라. 민주투사와 대통령을 지낸 그가 국민화합을 위해 어떤 자세를 보이고 있는 가를.
말은 메아리 효과를 지닌다. 더구나 독설은 상대방에 던진 수류탄이 터지지 않고 다시 날아오는 것과 같은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 YS의 칠푼이 발언이 그렇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천냥 빚을 질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노인이 되면 시간의 가치와 말의 가치를 터득해야 존경 받는다. 말에도 온도가 있다. 따뜻한 말을 하는 사람은 덕망이 있어 보인다. 독설은 얼어붙은 영하의 단어 나열이다. YS는 따뜻한 성격이라 기자들에게 인기가 높은 데 아들 때문에 이래저래 스타일을 구기고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