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반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이란 그림을 아주 즐겨보았던 기억이 있다. 호롱불 아래에 옹기종기 둘러 모여 앉아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어린 나이였지만 ‘거룩’이란 개념을 그 그림을 통해 종종 상기시켜보았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거룩할 때가 언제인가. 바로 먹을 때가 아닌가. 부자, 가난한자, 배운자, 못 배운자, 교도관, 수감자, 목사, 신자 할 것 없이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처럼 가장 거룩한 얼굴은 없는 것 같다. 사람이 먹을 때의 얼굴은 바로 어머니의 몸에서 적신의 몸으로 나와 젖을 물고 입을 움직임으로 생명을 준 이와 생명을 받은 이가 무언의 공동체 의식을 본능적으로 이루어나가는 거룩한 모습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이 때 만큼은 생각과 이념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배고픈 원수에게도 음식을 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룩한 인지상정의 깨달음 때문이리라. 그 원수 역시 한때 엄마의 젖을 물고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던 사랑받는 아기가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세월이 흐를수록 왠지 모르게 자신이 점점 본능적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는 점점 타성에 젖어가면서 급기야는 자신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수준까지 가고 있다는 소름끼치는 사실을 감지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누구나 삶의 일면에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자신 안에서 엄마의 젖꼭지를 물던 거룩한 얼굴을 점점 찾아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고흐는 감자먹는 사람들이라는 작품 속에서 지극히 평범한 얼굴들을 통하여 인간의 잃어버린 거룩한 얼굴을 다시 찾아보고자 호소했을지도 모른다.
이민생활에서 우리는 교회 찾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교회를 왜들 찾아오나. 잃어버려가는 얼굴들을 다시 찾기 위함이다. 세상이라고 하는 현상적 물리주의에 지나치게 피해자가 되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들을 보기 때문이다. 웃음도, 울음도, 즐거움도 가족 간의 안락함도, 친구간의 신뢰감도 앗아가 버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공의 적 ‘아이리스’는 바로 우리들의 얼굴을 잃어버릴 때에 더욱 거세진다.
그래서 교회 찾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곳에 가면 감자 먹는 사람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찬송하는 사람들의 얼굴, 기도하는 사람들의 얼굴만 바라보아도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나의 얼굴을 찾은 듯 울컥 울음이 북받쳐 올라오기도 한다. 어머니의 얼굴이 보인다. 아버지의 얼굴이 보인다. 하느님의 얼굴이 보인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만 들어도 심령에 파고드는 온유한 힘과 감격에 사로잡힌다. 교회 찾는 사람들, 부디 교회에서 줄 수 있는 것은 감자밖에 없다는 것을 함께 배워나가기를 오로지 소망할 뿐이다.
매주 수요예배는 사제관에서 모인다. 예배 전에 ‘Rev. Choi’s Table’이라는 저녁식사 시간이 있는데 내가 쉐프가 되어 간단한 요리를 직접 만들어 사제관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시간이다. 돌아오는 수요일 저녁 메뉴는 찐 감자를 한번 준비해볼까 한다.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밤에 뜨거운 김을 호호 불어가며 잘 익은 감자를 소금에 찍어 입에 넣어볼까 상상해 본다. 감자 먹는 성도들의 얼굴들, 서로 눈과 눈이 교차하는 선한 시선, 떡과 생선을 놓고 우리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짓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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