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즐겨 고아원놀이를 하곤 했다.나의 역할은 항상 착한원장이었으며 두 동생들은 고아들이었는데 순순히 잘들 따라주었다. 나는 이 고아들을 잘 거두기 위해 동생들 앞에서 설탕과 소다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뽑기를 만들어냈는지 모른다. 커가면서 학적부마다 장래희망이 고아원원장이라고 자신 있게 쓰곤 했었다.
세월이 흘러가며 가정을 가지고 애들을 양육하며 분주히 살면서 점점 그러한 생각들과는 차츰 멀어지게 되었다. 십오 년 전에 예기치 않게 일어난 남편의 의료사고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아직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 수없는 일급 장애인으로 만들고 말았다. 남편의 치료를 위해 여러 재활원을 다니면서 자연히 많은 장애인들과 병약하신 노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중증장애자나 소외되고 병약한 노인들에게는 어떠한 괴로움들이 있고 어떤 희망을 갖고 살아갈까 하는 의문과 함께 내 마음은 어느덧 그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우연한 기회에 봉사단체인 "아름다운여인들의 모임"의 북가주지부장을 맡게 되었다.정기 활동 중 하나는 뜻을 같이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악기를 다루고 합창을 연습하여 양로원 공연을 하는 것이다. 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 헤이워드에서 바트로 오시는 분, 멀리서는 산호세에서도 멀다 아니하시고 열심히 참석하신다. 지난 공연에서 노래를 부르다 쳐다보니 여기저기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있어 조금은 걱정이 되었으나 곧 생각이 바뀌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동안 마음속에 눌렸던 슬픔이나 공포의 기분을 토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였다.그리고 더욱 신기한 것은 위로를 드리러 갔는데 오히려 우리가 더 많은 위안과 행복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닌가?
지금 내 옆에는 우리 단원들이 나와 같이 울고 웃으며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다.뛰어다니다가 우연히 마주친 시선에서는 우리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사랑하며 인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느낀다.
어렸을 적 꿈꿔왔던 고아원봉사는 아니지만 양로원봉사로서 병들고 힘없는 소외된 분들을 조금이나마 즐겁게 해드릴 수 있다면 보람으로 알고 살아가겠다.
그리고 옛날에 내가 멋지게 만들던 설탕 뽑기 대신 오븐에 예쁘게 과자를 구어서 우리회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겠다.
(아여모 북가주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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