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애틀을 찾는 여행객들은 본전생각이 나기 십상이다. 허구한 날 찌푸린 하늘에 비까지 질척질척 내리니 따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타주 사람이 겨울에 시애틀로 이주해오면 금방 정나미가 떨어져 다시 떠날 궁리를 한다는 말도 있다.
운 좋게도 필자는 6월 마지막 날 시애틀로 전근 왔다. 땡볕 LA에 비하면 시애틀 초여름은 별천지였다. 그해 겨울날씨가 을씨년스러웠지만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올 별천지를 기다리며 몇 달 참는 건 문제도 안 됐다. 그렇게 10년을 살았다.
시애틀에서 맞은 첫 겨울에 필자를 주눅 들게 한 건 날씨 아닌 시간이었다. 해가 너무 늦게 뜨고 너무 일찍 졌다. 출근시간은 본래 6시이므로 그렇다 쳐도 LA에서라면 대낮인 5시에 한밤중처럼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고 퇴근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장장 15시간 이상 이어지는 밤이 너무 지루했다. 밖이 캄캄해서 잠자리에 들었다가 자정도 안 돼서 잠이 깨 낭패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책을 펴들면 1시간도 못가서 눈이 쓰렸다. 직장에서 온종일 컴퓨터를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TV는 주로 뉴스만 본다. 드라마나 영화도 별로다. 술을 전혀 못하므로 남들처럼 ‘나이트 라이프’를 즐길 처지도 못된다.
그래서 시작한 게 녹음이다. 눈 대신 귀를 더 사용하는 오락이다. LA에선 LP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지만 시애틀에선 컴팩디스크(CD)에 녹음했다. 그 무렵 CD 레코더가 대중화됐기 때문이다. LA의 아내 몰래 중고품 전축을 장만했다. 굿윌, 구세군 등의 트리프티 스토어(잡동사니 중고품 가게)를 찾아다니며 헌 LP를 사 모았다. 마침 시애틀의 모 FM 방송국이 소장했던 수만 장의 LP가 폐기처분돼 동네 골동품 가게에 통째로 나왔다. 필자는 참새가 방앗간 들락거리듯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가 거기 있는 60~70년대 팝송 판들을 싹쓸이했다. 장 당 대개 50센트~1달러지만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수퍼스타들의 앨범은 10~20달러를 호가했다. 몇년동안 그렇게 사 모은 중고 판이 줄잡아 3,000매에 육박한다.
CD 한 장(80분)에 통상 25곡을 녹음할 수 있다. LP를 고스란히 수록하지 않고 마치 신문을 편집하듯 구색을 맞추며 한 LP에서 한두 곡씩만 뽑아낸다. 우선 LP를 구입한 날짜별로 녹음하지만 나중에 발라드, 영화주제가, 컨트리 뮤직 등 장르별로, 또는 피아노, 기타, 트럼펫 등 악기별로 다시 녹음한다. 클래식을 팝으로 편곡한 곡들만 골라 따로 녹음하기도 한다. 잡음을 줄이기 위해 녹음하기 전에 판과 바늘을 정성들여 청소한다. 이런 식으로 CD 한 장을 녹음하는데 대개 3시간이 소요된다. 하룻밤 시간 때우기에 안성맞춤이다.
젊은이들은 전축에 코를 박고 녹음하는 필자 모습이 궁상맞다며 핀잔한다. 컴퓨터에서 다운받아 MP3에 저장하면 LP보다 훨씬 깨끗한 음질을 훨씬 쉽고, 훨씬 빠르고, 훨씬 많이 즐길 수 있단다. 모르는 소리다. 인터넷의 선곡 폭은 필자가 수집한 LP에 족탈불급이다. 미국보다 한국과 일본에서 더 유행한 미국 팝송이 많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거나, 크게 히트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네 정서에 맞는 노래나 연주곡들도 의외로 많다.
지난 10년간(꼭 겨울밤만이 아니고) 녹음한 CD가 거의 2,000개, 거기 수록된 곡이 5만여 개를 헤아린다(중복녹음도 많다). 빌리 본, 로렌스 웰크, 폴 모리아, 레이 카니프 등의 CD는 각각 20여개를 웃돈다. 그동안 전축바늘을 14번 갈아끼웠다. 계산상으로는 전체 CD 제작에 5,000여 시간이 소요됐다. 200일 이상을 쉬지 않고 계속 녹음한 셈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지나치다. 그러나 CD 녹음은 시간 때우기 이상의 효과가 있다. 정신을 집중해 녹음하다보면 잡념이 사라진다. 그날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제격이다.
필자의 소일(消日) 아닌 소야(消夜) 방법을 누구에게나 권하는 건 무리다.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할일이 그렇게도 없느냐”는 핀잔을 수없이 듣는다. 독서, 뜨개질, 서예, ‘수도쿠’ 등 바람직한 시간활용 방법이 달리 많이 있다. 한국 드라마를 두세 시간 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우중충한 시애틀 겨울밤을 우울하게 보내는 것보다는 정신건강에 훨씬 좋다.
윤여춘(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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