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 고릴라처럼 거대한 한 체인 스토어에 들어섰다. 체인 스토어가 모두 그렇듯이 어느 곳에서도 모두 한결같은 분위기와 이미지다. 그날도 생전 처음 와 본 도시에서 필수품을 사기 위해 자동문을 들어서자마자 망설임 없이 발이 기억하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즐비하게 진열된 미디어 섹션을 지나는데 눈길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영화 ‘닥터 지바고’였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마지막 남은 닥터 지바고 DVD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난 이미 블랙홀과도 같은 두 남녀 주인공의 애잔하면서도 강렬한 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 40년을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사십 년 전 여름밤이었다. 언니는 열세 살 개띠고, 나는 열두 살 돼지띠였다. 그때 우리는 진짜 촌닭이었다. 자식들 교육 때문이라는 거창한 이유를 내걸고 도시행을 결심한 아버지를 따라 시끌벅적한 도시에 도착했지만, 나와 언니는 우리의 앞날이 아버지가 내 건 슬로건처럼 그렇게 거창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려 버렸다.
그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작은 오빠도 그런 상황을 알아 버렸나 보다. 그래서 우리를 시립 도서관(그 당시에는 다른 도서관은 없었다)에도 데리고 가서 책을 접하게 하고, 시내 영화관에 명화가 들어와 학교에서 ‘학생입장’을 허락하면 부리나케 우리를 데리러 집으로 달려왔다. 그런 오빠의 노력에 대한 보람도 없이 그때마다 개띠 언니와 난 집에 없었다.
그만큼 개띠 언니는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싸돌아다녔다. 나 또한 개띠 언니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날도 오빠 학교에서 ‘학생입장’으로 영화관람이 있었다. 오빠는 학생들을 인도해 영화관으로 가던 중에 살짝 이탈하여 집으로 달려왔다. 역시나 우리는 집에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언니와 나 대신 집에서 얌전히 책을 읽고 있던 국민학교 4학년짜리 여동생만 데리고 갔다. 한참 후에 집에 돌아온 우리는 엄마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 속상해 그만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발발거리고 다니는 언니 때문에 놓친 기회가 분해서 울었을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엄마는 희망을 턱하니 던져 주었다.
“쩌~어기 극장에서 본다고 하드라. 지금이라도 얼릉 가 봐라.”
나는 엄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문지르고 벌떡 일어났다. 개띠 언니는 나한테 미안한 맘이 들었던지 앞장을 섰다. 극장이라는 곳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른 우리는 무작정 극장이라는 곳을 찾아 나섰다. 시장통 입구를 막 벗어나려는 찰나 개띠 언니가 내 손을 다급하게 끌어당기며 ‘떨이’를 외치는 생선장수보다도 더 크게 외쳤다.
“저기다!”
언니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정말 극장이 있었다! ‘태평극장’이라는 글씨가 알록달록 치장을 하고 공중에서 번쩍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태 평 극 장, 태평 극장, 태평극장’. 개띠 언니는 이제 곧 영화가 시작될 터이니 앉아서 보자고 했다. 언니는 비릿한 생선궤짝 쪼가리를 주워왔다. 그런데 아무리 고개를 쳐들고 기다려도 영화는 시작되지 않았다. 네온사인을 따라 읽는 것도 지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새 서로 머리를 맞대고 개천에서 살살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꾸벅거리다가 한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느그들 여기서 뭐하냐?”
“영화 볼라고.”
“뭐? 영화는 볼쎄 끝났는디?”
나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개띠 언니를 노려보면서 털래털래 오빠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아! 나는 좌절스러운 마음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짐했다. ‘내 다시는 개띠 언니 안 따라다닌다!’
그래서일까. 개띠 언니와 난 평생을 가까운 곳에 살아 본 적이 없다. 지금도 우리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다. 인생의 해가 기우는 걸 바라보면서 나는 가끔 생각에 젖는다.
‘그래도 언니를 따라다닐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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