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일본”을 출사표로 던져 보수 자민당의 장기집권에 종지부를 찍었던 일본의 하토야마 총리가 지난 2일 총리직을 사임했다.
하토야마는 일본 시민들만 꿈꾸게 한 것이 아니다. 8개월 전, 하토야마 정부의 등장은 한국인들에게 한일관계의 전향적 개선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자민당과 달리, 민주당 내에는 일제가 저지른 과거의 만행에 대해 비판적인 성향을 가진 의원들이 많았다.
하토야마 자신이 야당 시절부터 일본의 전쟁범죄 조사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죄 및 보상 등과 관련된 법안들을 여러 차례 제출해 왔고, 총선 승리 직후에는 “(차기 정권은) 역사 인식에서도 과거를 직시할 수 있는 정권이 될 수 있다”며 “그게 전 (자민당) 정권과의 차이”라며 과거사 청산 의지를 강하게 제시하기도 했다.
취임 후에는 재일동포의 지방선거 참정권 부여법안을 추진하거나, 위안부·징용피해자 등에 대한 사과와 보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전후보상 법안’ 처리에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에게 거는 우리의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지난 5월 29일 제주도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하토야마 총리가 “일본은 과거를 정확히 직시하며 반성해야 할 것은 반성하겠다”면서 “다음 100년을 향해 미래지향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을 때, 이 발언의 진실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의 발언이 있기 두 달 전에 일본 문부성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기한 초등교과서를 발행하기로 발표했으며, 하토야마 또한 지난 4월7일 일본 기자들에게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표기) 문제에 대한 정부 입장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해 그의 본색이 들어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제국주의적’ 마인드가 밝혀진 이상, 그에게서 한일관계의 새로운 100년을 열어갈 미래지향적인 진정성은 이미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하토야마 사임 후, 부총리 겸 재무상이었던 간 나오토 부총리가 신임 총리로 선출됐다. 간 신임 총리는 그 동안 관료 주도 일본 정치에 대한 불신을 분명히 했고, 지방분권을 통한 권력 재분배, 국민생활에 초점을 맞춘 제도개혁, 국민주권 시대 창출, 동아시아 안전보장포럼 등을 주장해 온 인물이다.
그의 전임 하토야마와 함께 저술한 책에 제시된 그의 개혁안들을 토대로 본다면, 간 정권의 기본 정책 방향은 하토야마가 제시한 비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간 담화’의 가능성은 ‘하토야마 담화’에 내포되어 있었던 한계마저도 그대로 계승할 확률이 높다.
지난 5월 10일, 한일 양국의 지식인 214명은 ‘한일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을 서울과 도쿄에서 동시에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양국 지식인들은 첫째로 일본의 한국 병합과정이 불의부당하다는 점, 둘째로 일본이 병합의 근거로 삼은 병합조약 역시 불의부당하다는 점, 마지막으로 병합조약 및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협정을 원천무효라고 선언한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대한 해석은 이미 원천 무효(already null and void)였다고 하는 한국 측의 해석이 공통된 견해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을 선언하였다. 한일 지식인들은 강제병합 100년의 상징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본 정부의 근본적인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한일 지식인선언은 그동안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일본 지식인 사회의 주류 시각인 ‘유효부당설’, 즉 ‘조약은 유효하지만 도덕적으로 책임질 부분이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고, 조약 자체를 무효로 규정한 ‘한일병합 불성립론’을 수용한 최초의 양국 지식인 선언이다.
새로 출범한 일본의 간 총리 정부는 하토야마의 좌절을 ‘반면교사’로 삼아 한일문제에서 최소한 한일 지식인선언을 토대로 전향적 대한반도 정책을 펴나가기를 권고하면 특히 일본 외교의 가장 큰 미제로 남아있는 북한에 대한 배상과 관계정상화에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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