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순이는 초등학교 친구다. 이웃동네에 살았던 봉순이가 동창회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28년 만에 처음으로 동창회에 가 보았다. 학교는 경북 칠곡군 왜관읍, 낙동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자그마한 시골학교다. 81명의 동창생은 6년을 거의 한 반에서 지냈다. 봉순이는 우리 중에 가장 불우한 아이였으나 가장 인생을 잘 살아온 친구 같다.
처음 가는 동창회라 설레는 마음으로 교정을 들어서는데, 그곳엔 아이들 대신 늙수그레한 중년들로 가득해 당황하였다. 너무 생경하여 머뭇거리는 나에게 “너는 누구니?”라며 신사 한 분이 손을 내밀었다. 통성명을 하자, 삽시간에 폭소가 터졌고, 우린 이내 몇 십년의 세월 저편으로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었다.
어느 심리학자가 ‘인생각본을 미리 써놓고 그 각본에 의해 살아간다’라는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어릴 때의 환경과 성격들이 친구들의 인생관과 직업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듯하여 내심 놀라웠다. 정의롭고 의협심 강했던 친구는 파출소 소장으로, 총명하고 날카로웠던 친구는 기자로, 돈을 땅에 묻고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는 친구는 사업가로, 고향에 뜻을 둔 친구는 농부로, 제각기 삶의 의미와 자부심을 느끼며 사는 모습들이 보기에 좋았다.
1960년대, 우리의 유년시절은 몹시 혼란스럽고 배가 고팠다. 친구 중에는 기성회비를 내지 못한 친구도 있었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친구도 있었다. 봉순이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산에 있는 어느 공장으로 돈을 벌러 떠났다. 그리고 2, 3년 후에 아들을 낳아 데리고 왔다. 아이 아빠와 함께 고향을 다녀간 후, 나는 봉순이를 만나지 못했다.
어린 시절의 봉순이는 우리 반에서 키가 가장 큰 말썽꾸러기였다. 고무줄놀이하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종종 고무줄을 끊어 놓기도 하고, 책상을 도미노처럼 무너뜨려 교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 때문에 차돌멩이로 별명이 붙은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가파른 산꼭대기까지 뛰어서 선착순으로 내려오는 혹독한 단체기합도 종종 받았다.
봉순이는 학교가 끝나고 나면 신작로 옆, 술도가 하던 자기네 큰집에서 술심부름과 허드렛일도 억세게 했다. 우리는 하굣길에 그 집을 지나야 하는데 봉순이를 만나게 될까 봐 오금이 저렸다.
동창회에서 만난 봉순이는 담담하게 자신의 출생 비밀을 털어놓았다. 아버지도 엄마도 친부모가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생육사를 싹둑 잘라내고 싶을 만큼이나 학대받은 성장과정이 억울해서 백방으로 친엄마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할수록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새엄마가 십여 년을 양육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고 용서가 되더라고 했다. 봉순이는 돌 틈 사이를 비집고 피어난 풀 한 포기도 존재의 가치와 의미가 있을 텐데, 불행했던 과거가 있었기에 사람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겠느냐며 오히려 감사하다고 했다.
아들이 경북대학교 의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며 잘 자라 주어 고맙고, 자신을 사람 되게 해 준 남편이 고맙다고 한다.
지금도 남편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열리고 샘물이 차오르듯 뿌듯해진다고 한다. 봉순이는 틈틈이 공부하여 중,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여 사회에 봉사할 꿈을 꾸고 있었다. 17살에 낳은 아들이 대학생이 되고서야 “엄마가 너무 젊어 그동안 미안했다”라고 고백하자, “저는 엄마가 젊어 너무 자랑스러웠어요”라고 말하는 아들 앞에서 주책없이 펑펑 울었다고 한다. 상처받은 자신의 어린 영혼을 껴안고 어둠을 빛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성찰했을지 알 것 같다.
자신이 처한 불우한 환경을 솔직히 인정하고, 거짓 없는 용기로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봉순이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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