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떠올릴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대표하는 그 무언가를 끄집어낸다. 그 무언가가 특정한 인상착의일 수도 있고, 독특한 행동 혹은 말투일 수도 있다. 그러한 특징들은 겨울 끝에 밀려오는 춘풍처럼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어루만져 준다.
눈 쌓인 로키산맥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집에는 태평양 언저리에서 밀려오는 춘풍이 팔랑거리곤 한다. 와글와글 팔남매를 낳아 키우시면서 어찌 쨍쨍한 날만 있었을까마는 친정 어머니는 언제나 뙤약볕 아래서 청량음료를 마신 얼굴이다. 눈은 거의 까막눈에 가깝다. 최소한의 생존에 관한 것만 겨우 익히고 사신다.
꿈 많던 처녀 시절에 언문을 깨우쳐 보겠다고 야학을 다녔는데, 장대처럼 키가 크신 외할아버지가 자신보다도 더 큰 장대를 마루에 준비해 놓고 딸의 밤 외출을 감시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그만둬야만 했던 그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과 원망은 헐거워진 수도꼭지에서 새는 물과 같다.
라면처럼 꼬불꼬불한 말을 하는 나의 두 딸이 드디어 그런 외할머니를 방문하겠다고 맘을 먹었다. 나의 두 딸은 한국어에 까막눈이었으니, 나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최소한 외할머니처럼 만들어 주기 위해 노트와 연필을 두 딸에게 내밀었다. 천성이 조용하고 얌전한 큰 딸은 가르쳐 준대로 또박또박 한국말 그림을 그려나갔으나, 성격이 호탕하고 털털한 둘째 딸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작대기가 너무 많다고 투덜거렸다. 드디어 두 딸은 ‘할머니’를 ‘하머니’ 정도는 쓸 수 있게 되었다.
태평양을 건너 외할머니 집에 도착한 두 딸을 위해 난 거의 매일 전화로 통역관 역할을 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전화 걸려 오는 횟수가 뜸해졌다. 오히려 내가 더 안달이 나기 시작한 모습에 두 딸은 말했다. “옴마(엄마), 우리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옴마(엄마) 걱정하세요.” 저희들 걱정하지 말고 엄마나 잘 있으라는 두 딸의 푸대접에 수화기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밤에 전화가 득달같이 울렸다. 지나던 바람까지도 눈꺼풀이 무거워질 시간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두 딸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나는 날으는 화살을 낚아채 듯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둘째 딸은 인사 한마디 없이 다짜고짜 질문을 해 왔다.
“옴마(엄마), What’s 호랑?”
“호랑이는 타이거인데, 너희들 동물원에 갔니?”
“노~오~, 우리 하머니(할머니) 집에 있어요.”
나는 한참 동안 외할머니와 두 손녀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들어야만 했다. 그동안 두 딸은 ‘빨. 간. 색’을 ‘삘. 간. 색’으로 발음하는 외할머니의 독특한 언어 창출 때문에 뇌에 지진이 일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전을 뒤적여도 ‘삘간색’이 나올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호랑’이라는 신종어가 또 튀어나온 것이다.
할머니와 함께 재래식 시장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할머니의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것이다. 두 딸은 혹시 할머니가 깜박 잊고 지갑을 챙기지 않으셨나 싶어 할머니에게 물었다.
“한머니(할머니) 돈 가지고 가요?”
“호랑에 있어.” ‘호랑’이라는 말을 이해할 리가 없는 두 딸은 또 물었다. “한머니(할머니), 돈 어디 있어요?” 그러자 할머니는 또다시 대답했다. “아이, 호랑에 있당께” 하면서 허벅지를 툭툭 쳤다.
돈과 할머니의 허벅지는 두 딸에게 메가톤급 미스터리였다! 두 딸은 그 메가톤급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다급하게 전화를 걸게 된 것이다.
‘호랑’이 ‘호주머니’의 전라도 사투리라는 나의 설명에 두 딸은 탄성을 지르며 할머니의 단어 목록에 ‘호랑=pocket’이라고 추가했다. 두 딸이 한국을 떠나올 즈음에는 수첩에 할머니의 단어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가끔 아이들은 북적거리고 있는 할머니의 단어를 끄집어내어 깔깔거린다. 그 웃음소리가 로키산맥에 자리한 오두막에 겨울을 밀어내고 봄을 부른다. 나도 누구에겐가 겨울 끝에 불어오는 춘풍이고 싶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