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장만한 살림살이는 TV였다. 그때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생들이어서 영어를 빨리 배워야 했기 때문에 영어 개인 교수를 대신 TV가 해 주리라고 생각해서 사 들인 필수적인 물건이었다. 점점 아이들이 TV와 지나치게 친해지더니 학교 공부를 등한시 하기시작했다. 그래서 시간을 정해 놓고 2시간만 보게 했다가 주말에만 보게하 기도하고 그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아 전기 선을 아주 잘라버리기도 하고 그것도 안되서 TV를 거두어 원래 대로 상자 속에 아주 집어 넣고 테입을 단단히 붙여 지하실에 내려다 놓았다. 그래도 어느새 꺼내서 보았는지 퇴근 후 집에 와서 보면 TV는 상자 속에서도 따끈 따끈하게 달구어져있었다.
물증이 있는 데도 자기들은 TV를 안 봤다고 잡아 떼는 것이었다. 아이들과 전쟁에 한계를 느낀 나는 TV 두대를 모두 길에 내다 버리고 들어 와서 세 아이를 앞에 앉혀놓고 말했다.
“이제는 너희들과 싸움에 엄마가 지쳤다. 이것 때문에 너희들은 거짓말 쟁이가 되어가고 나는 성질만 나빠지니 약속대로 TV는 버렸다. 너희들이 집에 남아있는 동안은 다시 TV를 사지 않는다.”고 선언을 했다. 이렇게 한참 아이들을 훈계하고있는데 우편 배달부가 지나가다가 밖에 버려진 TV가 새것같은데 정말로 버린 것이냐고 물으면서 자기가 차에 싣고 가도 괜찮겠냐고 했다.
사실은 잠깐 아이들만 혼을 내고 들여놓으려는 속셈이었 는데 버린 물건이 아니라고하면 아이들 앞에서 위신이 서지않을것 같아 가져가라고 허락을 하고나니 후회스러웠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TV가 없는 집은 평화스러웠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 심심하다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심심하면 피아노를 치고 놀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심심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하면 잔소리 안해도 아이들이 책과 친해질 수 있을가 생각하다가 “엄마오리가 앞서가면서 엉덩이를 졸랑 졸랑 흔들면 새끼들이 엉덩이를 실룩 거리며 졸졸 따라가듯이 내가 책을 읽으면 아이들도 따라하겠지!”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기로 했다. 집에 굴러다니는 다이제스트를 집어들고 들여다보니 흰종이에 검은 글씨가 써있다는 것 정도 구별이 되고 영어 실력이 없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니 한심했다. 책을 읽었다는 표시는 하고싶어 하루에 한장씩 눈으로 훑어보고 그 페이지를 없애 버렸다. 뜻도 모르고 다이제트 두권을 통독 했다고 셈을 하고 그 다음에 용기를 내 도서관에서 유아용 동화책을 빌려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기를 28년이 지났다. 아이들은 다 자기 갈 길을 가고 빈 새 둥지처럼 집은 한산해 졌다. 드디어 TV를 사기로 말했던 2010년도가 됐다. 연초에 딸이 TV를 사라고 주었던 돈은 다른 일에 쓰고 살 생각을 안 하니까 이번에는 아들이 커다란 TV를 사다가 거실에 설치 해놓고 갔다.
그런데 거실에 앉아있는 TV가 시커먼 괴물로 보이면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주위에서는 TV 없이 심심해서 어떻게 생활 하느냐고 묻지만 실은 나는 TV 없어도 인터넷 두들기고 영자신문, 한국일보, 전문지인 일본 잡지, 타임스, 내셔널 지오그라피, 문예지, 의료 정보 등등 읽어야할 글들이 매일 쌓여있다.
직장 일하고 돌아와서 다른 사람들이 TV를 보는 시간이면 뒤늦게 시작한 그림 그리는 일이며 피아노 치기 시작한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있다. 더욱 놀란 일은 언제 부터인가 내 손에는 수백 페이지되는 영문 고전 소설 이 들리워 지게 된 일이다. 아이들 공부시키려고 시작한 TV 없애는 작업이었는데 내가 공부를 한 셈이었다. 말년에 나의 혼신을 쏟을 수있는 재미있는 일 들을 접어두고 TV를 보아야 하는가 고민 하고있을 때 피아노 건반위에 은은하게 내려앉은 조명등 불빛이 나의 마음을 끌어 당기고있었다.
강혜정 /폴스 처치,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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