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감사의 달이다. 쑤 소저와 홍성언이란 두 남녀가 일기일회의 만남의 자리에서 베푼 한 의로운 행위가 국가 존망의 기로에 서있던 조선왕조를 멸망에서 건져낸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소개하고저 한다.
홍성언은 조선국이 중국에 파견한 통역관이었다. 그는 지금의 서울 필동에 살면서 북방 무역을 하던 상인이었으나 뜻을 세워 과거에 응시하고 역관 벼슬에 올랐다.
그 홍성언이 신출내기 외교관이 되어 명나라 연경에 묵고 있을 때 일이다. 한 저녁 그는 무료함을 메울 작정으로 자금성 밖 선녀루라는 유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객실에 나타난 창녀는 들어오자마자 훌쩍훌쩍 울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무슨 상스러운 몸가짐이냐!’고 호통을 치는 그의 무릎에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하는 말 인즉 자기 아버지가 남의 모함에 빠져 관가에 영어의 몸으로 갇혀 있기에 그 보석금을 마련하고자 자기 몸을 팔러 나온 길이라는 섬뜩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요한 방안, 명멸하는 촛불은 가냘프게 들어낸 창녀 쑤 소저의 뒷목을 슬프도록 비치고, 흐느껴 오열하는 그녀의 몸은 떨리고 있다.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듯 마음이 감동된 홍성언은 쑤 소저의 손을 잡고 갖고 있든 전대에서 돈 천 냥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몽매의 순간이 흘렀다. 제 정신이 돌아온 쑤 소저가 자리를 뜨려는 홍통사의 소매를 붙잡고 ‘워 커어이 쯔도 니더 싱밍 마?’(나리님, 성함 만이라도 알려 주시고 떠나세요) 눈시울을 적시며 연거푸 묻는 말에 조선국 통사인 홍성언이라 간단히 답하고는 칠흑의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홍성언이 귀국하고 축낸 판공비를 변상하느라 힘겨운 한 해를 보내고 있는 사이 이웃 일본에서는 군웅할거하던 다이묘들을 무력으로 통합한 풍신수길이 그 여세를 몰고 조선 정벌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1592년 춘 4월, 드디어 16만의 대군을 이끈 풍신수길의 사무라이 패거리들이 수백 척의 전함을 앞세우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터진 것이다. 조선왕조 창건 200년, 미 대륙이 발견된 지 꼭 100 년의 시점이다.
왜군은 동래성을 3일 만에 무너뜨리고 하야또라는 발 빠른 정위부대를 교대전진 시키면서 전광석화의 속도로 불과 30일 만에 異胎院(지금의 이태원, 조선시대 왜인들의 혼혈아들이 살고 있었든 것에 유래됨)에 진을 치고 조선의 항복을 압박하니 다급해진 선조는 한양을 포기하고 의주로 몽진을 하기에 앞서 급히 이덕향을 수석으로 하는 구원 사절단을 명나라에 보내기로 하였다.
역관 홍성언도 그 뒤를 따랐다. 한편 사절단을 맞이한 명나라 신종은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몸도 불편하여 일련의 절차를 병조판서에게 넘겼다. 이덕향은 시국의 다급함을 고하며 지금 왜국이 명나라를 치러 갈 터이니 길을 비키라(征明假道)면서 조선의 강산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술 한치망이라 입술이 시리면 치아가 망가지는 법이니 속히 원군을 보내 주십시오. 장황히 늘어놓는 궁색한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병조판서는 갑작이 너희 중 혹 홍성언이 있느냐고 화제를 바꾸었다. 홍성언이 앞에 나섰다.
그때 병조판서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젊은 여인에게 눈짓을 하니 “네, 깁니다 아버님. 그 분이 틀림 없습니다.” 확답을 들은 병조판서는 고개를 돌려 자기가 황제에게 상신하여 선처할 터이니 사절들은 곧 귀국하여 선조왕에게 그리 전하라하고 그들을 퇴장시켰다. 그로부터 3일, 명장 이여송은 북소리 드높이 원군 선발대를 이끌고 연경을 떠나고 있었다. 대충의 줄거리인 이 전설은 TV가 없던 시절 라디오 전파를 타고 자주 만담의 소재가 되었었고, 피천득 저 수필 ‘인연’에는 홍성언이 멋진 남자라 칭송하고 있다.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잊지 않고 있다가 그 은혜에 보답한 이 슬기로운 행적이 한갓 구전으로만 전하여진 것이 아쉽기만 하다. 기록의 탈락은 아마도 홍성언이 중인 출신이라는 신분 때문이라 추측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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