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건강정보센터 탄생의 주역 고 김영옥 대령(오른쪽)과 한응수 박사(가운데)가 KHEIR의 본격적인 업무 개시를 발표하고 있다,
초대 소장으로 오늘의 KHEIR 기반을 닦은 이명숙 초대 소장.
한인건강정보센터(KHEIR) <1>
의료·복지 그늘진 이웃 길잡이
이민자들이 봇물을 이루던 1980년대. 한인들은 ‘아메리칸 드림’이란 꿈을 이루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특히 건강관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뒷전이었다. 맨 몸으로 이국땅에 와 자리를 잡기도 빠듯한데 특별한 이상만 없으면 개의치 않는 한국적인 사고방식의 영향도 컸다. 이와 함께 미국의 의료체계, 그리고 당연히 받을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무관심은 당시 한인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고 김영옥 대령이 적극 추진
인맥·경험·정부‘3박자’조화 타운 무료건강검진 발전 계기
한인건강정보센터(KHEIR: Korean Health Education Information & Research Center)는 1986년 언어와 문화의 장벽으로 미국의 사회복지제도를 이용 또는 이해하지 못하는 한인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시작은 고 김영옥 대령이었다.
당시 김 대령은 오래 전 군생활을 마치고 LA 지역에서 각종 사회봉사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었었고, 미국의 구호기관인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에서 이사로 활약 중이었다.
그는 주류사회에 다양한 인맥을 갖고 있었고, 당시 케네스 한 LA카운티 수퍼바이저 위원(작고·제임스 한 전 LA 시장의 부친)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그에게 1980년대 중반 김 대령은 한인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벌일 수 있도록 예산을 배정해줄 것을 요청한다. 처음에는 빡빡한 재정형편을 내세우며 난색을 표시했지만 김 대령의 끈질긴 설득 끝에 예산을 지원받아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상당수 한인들의 의료문제에 심각한 고민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이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보건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인 중 상당수가 무보험자였고, 의료시스템에 관한 정보 부족이 심각한 수준인 반면, 한인사회에는 이 같은 현실을 해결하거나 지원할 수 있는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인물이 설립 작업에 참여하게 되는데 보건학 전문가였던 한응수 박사였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다시 UC버클리에서 보건학을 공부했던 그는 단체가 설립될 당시 남가주 한인의사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이 같은 인연으로 카운티 정부가 실시한 조사활동에 참여하게 됐고, 김 대령과 마찬가지로 의료 및 복지 지원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KHEIR였다.
케네스 한 수퍼바이저 위원은 김 대령에게 설립기금 4만달러 지원을 약속했고, 비영리기관 운영방식과 주류사회에 폭넓은 인맥을 가진 김 대령은 조직을 전담했다. 또 보건학 전문가였던 한 박사는 컨텐츠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3박자’가 잘 조화된 것이었다.
김 대령과 한 박사는 곧바로 KHEIR 운영을 전담할 소장 선발작업에 착수한다.
이때 지원서를 낸 인물이 이명숙씨였다.
당시 36세였던 이씨는 칼스테이트 노스리지 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막 끝냈던 참이었다. 대학시절에는 마이클 우가 LA 시의원 초년생으로 활동할 무렵 인턴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KCBS에서도 일하면서 지역사회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던 시기였다.
유나이티드 웨이 LA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김 대령과 한 박사는 이씨에게 “어떻게 이 단체를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주로 물었다.
강한 열정과 논리적인 답변으로 이씨는 초대 소장을 맡게 됐고, 한 박사가 초대 이사장이 됐다. 한 박사는 2004년 상근 부이사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정열적인 모습으로 KHEIR의 발전을 돕는다.
모든 준비는 빠르게 이뤄졌다.
초대 이사진은 한 박사를 비롯해 김 대령, 앤드류 김(의사), 폴샤 최(의사), J.C. 김, 마크 브라운, 이동일(의사), 사라 김, 정숙 밀러(간호사), 김영화(공인회계사), 스티븐 곽(의사), 차명수, 이연희(의사), 닉키 킨(간호사), 나신명, 제임스 한(의사), 수키 마루야마, 안상희, 김영일, 조규석(치과의사), 제니 김, 박철규, 조셉 김, 스티브 강씨 등으로 구성됐다.
또 자문위원회도 설립했는데 주로 의료관련 단체 중심으로 한인의사협회, 한인치과협회, 한인간호사협회, 한인약사회, 한인 한의사협회, 한인 소셜워커협회가 참여했다.
이와 함께 이 소장을 도울 스태프로 지나 김씨와 케시 백씨가 들어왔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둬야 할 점은 KHEIR의 ‘R’자가 처음에는 Referral로 사용되다 후에 Research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는 초창기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필요한 사회보장제도 및 의료서비스에 대한 정보제공이 주 업무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86년 9월 첫 사무실은 다운타운에 위치해 있던 캘리포니아 하스피틀에 마련됐다. 아직 재정적으로 부족한 상황을 안 병원측이 사무실과 전화를 무료로 제공했다.
이듬해인 1987년 초 이 소장은 사무실을 한인회관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 무렵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으로부터 2만5,000달러의 첫 기금을 확보했다.
이 소장은 KHEIR의 기반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또 초기 카운티 정부가 약속했던 지원금이 늦어지면서 얼마 동안은 자신의 지갑에서 돈을 털기도 했다.
1987년 4월4일 올림픽가 아드모어 공원(현 서울국제공원)에서 첫 헬스 엑스포(Health Expo)를 열었다. 한인은 물론 타인종 등 300여명이 몰렸다. 한인사회 무료 건강검진을 활성화시키는 계기였다. 또 같은 해 8월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헬스 페어도 개최했다. 일손이 부족해 자신이 새벽부터 나와 직원들과 직접 텐트를 치기도 했다.
서비스 영역은 노인으로까지 확대됐다.
1989년 5월2일 호바트 초등학교에서 실시한 건강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한 400여명의 한인 중 상당수가 노인들인 것을 발견한 이 소장은 본격적으로 노인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했다. 오늘날 데이케어 센터의 시발점이었다.
이와 함께 주류사회로부터 기금을 확보하기 위해 한글과 영문으로 된 뉴스레터를 만들었고, LA 카운티 의료시설과 사회보장제도 안내책자를 만들어 한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 소장은 1990년 초 2대 소장으로 부임하는 로라 전씨에게 업무를 인계하기 전까지 안정적인 운영을 위한 기반을 닦기 위해 하루가 부족할 정도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이 소장은 KHEIR를 떠난 뒤에도 가정상담소와 한미박물관 등에서 활동하며 한인사회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현재는 샌타모니카 칼리지 노인대학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며, 시니어 아트 파운데이션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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