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화는 꼭짓점 없는 球
재미·메시지 위한 영화는 삼각뿔… 통념 벗어나야 건강한 것
해외에서의 대접과 달리 한국 영화판은 홍상수에게 척박한 일터가 되고 있다. 그는“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며“제작비를 더 줄이더라도 나의 영화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영호기자 voldo@hk.co.kr
기자한테 메모지 한 장 달래서 쓱쓱 뭔가를 그린다. 논리학 교재에서 본 벤다이어그램 비슷하다. 삼각뿔과 구(球). 두 개를 그려놓고 둔중한 바리톤 음성을 높인다. “내가 만드는 건 이 구 같은 영화야. 삼각뿔이 아니라고!” <밤과 낮>의 홍상수(47) 감독이다.
홍상수의 여덟번째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번엔 대마초를 피운 사실이 발각돼 파리로 도피한 화가의 이야기다. 관객의 머릿수만큼이나 많은 감상과 해석, 더러는 오해를 낳는 그에게 “왜?”라는 질문은 애당초 초점을 잃은 것이었다.
“재미, 또는 메시지를 위한 영화는 삼각뿔 같은 거야. 꼭짓점(지향점)이 있고, 거기에 맞는 디테일만 수집해 몸통을 채우는 거지. 100명 중 99명은 똑 같은 반응을 보이잖아? 하지만 난 구 같은 영화가 좋아. 나는 삶 속의 모순점과 대칭되는 요소들을 그대로 영화 속에 넣는 거야. 꼭짓점은 없어. 그 속에서 무엇을 ‘픽업’해 내느냐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거지.”
당연하다고 여기던 삶과 의식의 부분이 문득 낯설어지는 순간이 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그 찰나의 낯섦에 틈입해 ‘부분’의 이물감을 확인케 한다. 그는 그 부분의 덩어리를 ‘통념’이라 불렀다. 여덟 편의 영화를 통해 그것을 조롱하고 부수어 왔지만, 대중에겐 아직 그의 의도가 낯선 것이 사실이다.
“통념은 항상 그럴듯한 것을 좋아하지. 그러나 일상에서 부딪히는 혼돈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돼. 오히려 방해가 되지. <밤과 낮>에서도 파리로 도피한 남자를 구원하는 것은 결국 아내의 거짓말이야. 구원의 과정이 항상 합당해야 한다는 것도 하나의 통념이라고 생각해. 통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게 진짜 건강한 것이 아닐까.”
실제라고 여기는 것의 허구성, 비정형의 형태로 존재하는 삶의 조건과 양태를 그리면서 홍상수는 항상 ‘남자와 여자’라는 틀을 취한다. 소설가 김영하의 표현을 빌리면 “한 번 달라는 남자와 그냥은 못 준다는 여자의 이야기”다. 홍상수의 구를 찍어내는 거푸집이 ‘남과 여’인 까닭은 무엇일까.
“남녀 간의 이야기만큼 정신 움직임의 복잡함을 보여주는 게 없는 것 같아. 이성적인 부분에서 가장 비이성적인 부분까지 다 들어 있잖아. 상투적인 것들, 혼란도 있고… 그래서 항상 좋은 소재라고 생각해. 얘기하기도 자유로워. 다른 소재는, 전쟁이 됐든 실화를 이야기하든, 주제의식의 강박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지.”
그러나 그 남녀의 이야기 구조에 적지 않은 관객이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왜 남자는 항상 전제적이고 색욕에 차 있으며 여자는 늘 현실적이나 결국은 순종적이냐는 비판. 홍상수의, 혹은 관객의 묵은 콤플렉스다. 부드럽던 바리톤이 다시 높아졌다.
“결국 자기 생긴 대로 영화를 보는 거야. 똑 같은 장면을 보고 누구는 페미니즘적 비판을 가하지만, 다른 사람은 매우 유쾌하다고 말해. 내 영화는 구처럼 방향이 없기 때문에, 그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대칭점 중 자기가 원하는 걸 끄집어 내 보면 되는 거야. 수사가 아니라, 진짜로 보고 싶은 대로 봐주면 고마워. 그게 내 의도니까.”
그렇다면 홍상수에게 영화는 자기 표현의 도구일 뿐일까. 그는 “어린애한테 밥 떠먹이듯 강요하지 않을 뿐” 자신도 소통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담뱃갑을 구겼다 테이블 위에 던져 놓으며 말을 이었다.
“저 담뱃갑의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고 생각해 봐. 100년을 글로 써도 정확하게 전달할 수는 없지. 모두들 자신만의 리얼리티 속에 사는 거고, 언어라는 최소한의 도구만 공유하는 거야. 하지만 자신의 리얼리티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헛소리’들을 하는 거지. 내 영화에 태도가 있다면 ‘삶에 대해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쉬운 일반론에 자신을 매몰시키지 마라’ 그거야.”
■ ‘밤과 낮’ 리뷰
파리로 도피한 화가의 초점없는 구애와 구원
화가 성남(김영호)은 우연히 피운 대마초가 문제가 되자 무작정 파리로 도피한다. 한인 민박집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옛 연인을 만나고, 보자르에 다니는 미술학도 유정(박은혜)도 알게 된다. 그리고 밤이 되면 서울에 남아 있는 아내와 통화를 한다.
영화는 성남의 시선을 따라 무료한 파리생활을 일기체로 엮어 간다. 길을 걷다 마주친 거리의 똥에 시선을 멈췄다가, 다시 북한 유학생과의 실없는 말다툼에 앵글을 고정한다. 성남은 유정에게 초점 없는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내 들려온 아내의 임신 소식에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영화는 밤과 낮의 두 시간대에 떨어져 있는 남녀가 국제전화를 통해 대화한다는 소재에 대한 감독의 호기심에서 시작했다. 거기에 프랑스 현지 촬영에 들어가서야 결정된 홍 감독 특유의 즉흥성이 더해졌다. 늘 같으면서도 다른,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감독의 예리한 시선이 촘촘히 박혀 있다.
전작에 비해 조금 분위기가 밝아진 듯하고, 리듬감이 더해졌다. 홍상수의 영화에 대한 글은 쉬 군더더기가 된다. 그러니 더 이상의 소개는 부질없는 일, 직접 보는 수밖에 없다. 홍상수가 던져 놓은 화두, 혹은 유머를 느끼는 것은 그의 말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니까. 28일 개봉. 18세 관람가.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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