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캘리포니아주 상원 법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알프레드 송(왼쪽 일어선 이)이 법사위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50년전 주의회 진출, 아시안 이민사 큰획
사탕수수 농장 이민 2세
소수계 성공 모델케이스
‘정치력 신장’이란 한인들이 미국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 커뮤니티 최대 현안이었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는 정치인을 양성하자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다민족·다인종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의 권리와 앞으로 이 땅에서 살아 갈 후손들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특히 1992년 4.29 폭동은 정치력 부재가 얼마나 큰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불러 오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민 100년을 훌쩍 넘어선 한인사회는 지금도 선거 때만 되면 한인 후보들의 당락에 일희일비하고 있다.
2차대전 참전 후 USC 졸업 변호사 활동
몬트레이팍 시의원·하원 거쳐
주상원 법사위원장 당시 민권법 제정 앞장
한인들의 정치 도전사는 195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시 시작은 가장 먼저 한인들이 자리를 잡은 하와이였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하와이는 1950년대 로버트 장과, 필립 민이 주하원 의원에 당선된 이후 현재도 한인 정치인들이 꾸준히 주 정치권에서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주류 정치권을 향해 도전장을 내밀었던 인사들 가운데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남가주와 연관지어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알프레드 송 전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2004년 10월11일 작고)과 김창준 전 연방하원의원이다.
이 가운데 알프레도 송은 미주 한인 정치도전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한 없는 열정을 가진 인물” “법률가중의 법률가” 등 많은 수식어들이 그를 따른다.
1919년 2월 하와이에서 출생한 이민 2세였던 그의 한국명은 송호윤이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며 하와이 대학을 다녔던 그는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공군으로 참전했으며, 이후 남가주로 무대를 옮겨 USC를 졸업하고 1952년 변호사가 됐다.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던 장소가 몬트레이팍이었고, 이 지역은 그가 앞으로 주류 정치권 도전에 중요한 발판이 된다.
그는 한인 이민물결이 시작되기 훨씬 전이었던 1960년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해 실시된 몬트레이팍 시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정치인으로서 거침없는 질주가 시작된다.
이듬해 실시된 45지구 주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한 캘리포니아 주 의회 사상 최초의 아시안 이민자 출신이란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며 주 의회에 정식 입성한다. 1966년에는 한발 더 나아가 28지구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가 주 하원의원에 도전장을 내밀 때만 해도 한인들 사이에서는 회의적이었다.
유색인종에 대한 주류사회의 거부감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고, 한인사회보다 훨씬 이민 역사가 긴 중국 및 일본 커뮤니티조차 제대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프레드 송은 그 같은 우려와 비관적인 전망을 뒤엎었고, 그의 발전과 의회내 영향력 증대는 곧 아시안 이민사회의 기록이자, 경사였다.
그를 잘 아는 한 중국계 인사는 “알프레드 송의 하원 진출은 캘리포니아주 인구구성의 다양화와 맞물려 정부기관 내 소수계와 여성들의 영향력 증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며 “특히 상원 진출은 아시안 이민사의 아이콘이었다”고 말했다.
작가인 르랜드 사이토는 자신이 쓴 ‘인종과 정치: LA의 아시안 아메리칸, 라티노, 그리고 백인’이란 책에서 송에 대해 “주류 정치권과 아시안 아메리칸 정치권의 선구자였다”며 “백인이 절대 다수인 지역에서 승리한 것은 유능한 아시안 정치인에 대해 백인들도 기꺼이 한 표를 보낼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상원에서의 그의 활발한 정치활동은 지역구 유권자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1970년 72%라는 몰표를 받으며 재선에 성공했고, 3선 도전이었던 1974년에는 더 올라가 74%를 얻는 등 승승장구했다.
주 하원 4년과 주 상원 12년 등 총 16년 의정생활을 통해 그는 주의회 최고의 법률 전문가로 캘리포니아주 사법 시스템과 입법부의 개혁을 이끌었다.
알프레드 송을 거친 법 가운데는 주 입법부 역사에 랜드마크로 지금도 인정받고 있는 ‘캘리포니아 증거법’(California Evidence Code)을 비롯해 소비자 보호와 소수계 권리 향상을 위한 법 등 정치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200여개의 법을 제정했다. 의회에서는 그가 상정은 법안을 ‘송 빌’(Song Bill)이라고도 불렀다.
그 가운데는 한인들도 지갑 속 필수품인 크레딧 카드와 관련, 숨겨진 수수료를 원천 봉쇄하는 법을 미 전국으로 최초로 만들었고, 아시안 차별 금지법도 그의 작품이다.
특히 그는 냉철하고 공정한 입법활동으로 1971년부터 법사위원장에 올라 입법부를 이끌었다. 그는 또 노동자 권익에도 앞장서는 등 약자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의 시기는 다가왔다. 1976년 난데없이 뇌물을 받았다는 부패 스캔들에 휘말린 것이다.
그는 그 같은 의혹들을 전면 부인하며 무고함을 호소했지만, 이듬해부터는 연방수사국(FBI)의 조사를 받게 되는 등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결국 1978년 4선 도전에서 송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면서 ‘깨끗한 정부’를 내세우며 도전장을 내민 조셉 몬토야에게 패하며,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연방의회 진출 꿈을 접은채 정계에서 물러나게 된다.
1980년 FBI는 장기간 수사 결과를 통해 무혐의임을 발표했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간 뒤였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몬토야란 인물이 나중에 의정활동 과정에서 저지른 7가지의 부패혐의로 연방정부에 의해 정식 기소돼 결국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일각에서는 알프레드 송을 음해하려 한 세력의 배후에는 몬토야가 있었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만약 그가 이같은 음모의 희생되지만 않았다면 첫 한인 연방 하원의원 탄생이 20년은 앞당길 수 있었기에 그의 정계 퇴진은 지금도 무척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의회를 떠난 뒤에도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제리 브라운 주지사 등의 지명으로 농업 노동관계위원회, 직업안정위원회, 의학위원회 등 주요 부서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한인사회 정치력 발전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던 그는 2004년 10월 11일 어바인의 한 요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한인사회와 아시안 커뮤니티 올드타이머들은 알프레드 송이 소수계 커뮤니티 정치력 신장의 귀중한 발판을 마련한 것은 물론, 나아가 주류사회에서도 아시안 정치인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이었다는데 이견을 달지 않고 있다.
<황성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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