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변호사>
1982년 11월13일은 필자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느낀 날로 기억된다. 그날은 김득구 선수가 복싱 라이트급 타이틀을 놓고 레이 맨시니 선수와 용감하게 싸우다 머리에 받은 충격으로 사망한 날이다. 물론 그날은 필자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정말 증오한 날이기도 하다. 그 ‘누군가’는 바로 레이 맨시니 선수였다. 일곱 살 때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증오가 아직까지도 여러 면에서 꽤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지난주는 바로 레이 맨시니와 김득구 선수간 경기의 25주년 기념일이었다. 최근 ESPN의 다큐멘터리에서부터 여러 신문들의 기사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여러 매체들에서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다시 다뤄졌다.
당시 필자는 여덟살 생일을 2주일 앞둔 나이였지만 당시 경기 장면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날은 토요일 오후였는데 한국인 권투선수의 경기를 본다는 기대감으로 온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았다. 라스베가스의 시저스 팔레스 호텔 야외 특설링에서 경기를 벌이는 두 권투선수를 보며 김득구 선수의 노란색 옷에 한글이 쓰여 있었고 링사이드를 가득 메운 백인 관객들이 맨시니 선수가 펀치를 날릴 때마다 환호하는 가운데에서 그가 얼마나 외로울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안타깝게도 경기는 후반 라운드로 가면서 맨시니에게 유리하게 흘러갔고 필자는 왠지 김 선수가 이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김 선수가 얼마나 강인한 모습을 보였는지를 느낄 수 있었고 경기 아나운서가 김 선수의 강인함을 칭찬할 때는 마치 필자가 칭찬받는 것처럼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날 오후 짧았던 시간 동안 김득구 선수는 당시 미국에서 드러내지 않고 살고 있던 모든 한인들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김 선수는 14 라운드에 접어들면서 마침내 다운되고 말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서려고 노력했다. 진정한 투사처럼 말이다. 필자는 그 당시는 김 선수가 뇌에 응혈이 생겨 혼수상태에 빠진 후 4일만에 사망했다는 것을 몰랐다. 필자는 또한 김 선수의 여자친구가 당시 임신 3개월이었으며 사후 결혼식을 올린 뒤 아들을 낳았다는 것도 몰랐다. 필자는 김 선수가 태어난 직후 남편을 잃고 홀몸으로 그를 길러야 했던 가녀리게 생긴 김 선수의 어머니가 하얀 소복을 입고 라스베가스로 날아와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하는데 동의했던 가슴 아픈 사연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10일 뒤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말았다.
하지만 필자는 당시 일곱 살 소년으로서 나와 같이 생긴 이 남자가 적진에서 한글이 새겨진 권투 트렁크를 입고 온몸으로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난생 처음 얼마나 한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꼈었는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김 선수는 당시 죽기살기로 싸웠던 것이다. 그날은 일곱 살의 소년이 좋든 싫든 자신이 한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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