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황들고 싶다/내 헐벗은 비탈의 풀뿌리를 캐면서/혹은 고픈 배를 안고/막막한 잔등의 멍에의 밭을 다 갈고 싶다/넉넉한 어둠 속으로 느리게 돌아와서/참 달게 밥을 먹고/그러나 더 자주 굶었으니 누렇게 앓아 눕고 싶다/부시시 일어나고 싶다/단지 살아있음을 기뻐하며 또 기뻐서/빈 가을의 가지마다/나는 금빛 어질머리로 떠오르고 싶다/부숙부숙 떠올라 하늘을 보면/내 웃음은 좀 모자라고 무척 단순해서/그런 빈 뱃속으로 사람 좋은 얼굴로/나는 사람들 깊숙이 들고 싶다/그리움처럼 아득히 오는 얼굴/내 소악한 냄새의 방안을 헹구는/바구니 속의 은은한 모과를 보면/차라리/나는 부황들고 싶다
가을만 되면 생각이 나서 꺼내어 여러 번 읽어보게 되는 이 시는 오랜 친구가 편지에 보냈던 시인데 시인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남편과 결혼해서 미국에 왔을 때, 붙잡아주던 실에서 툭 끊어져 홀로 허공을 떠다니는 연처럼 그렇게 모든 인연의 끈들로부터 끊어져서 외로운 날들이면 나는 옛 편지들을 꺼내어 읽어보고는 했었다.
취업준비로 내가 한참 정신이 없을 때 사학을 전공한 이 친구는 어느 날 속세를 떠나고 싶다며 서당으로 들어가 한문 공부에 열중하더니, 서양 미술사를 공부하는 남편 따라 프랑스에서 몇 년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지금은 중앙 박물관에서 일하며 고서들을 번역하면서 지낸다.
몇 년 동안 아무 연락 없다가 불쑥 만나도 낯설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그 친구가 그렇다. 늘 빙긋 웃으며 실 없는 말로 장난치면서도 나의 마음에 꼭 와 닿는 시들을 편지에 넣어 보내주던 그 친구는 마흔이 다 되었는데도 이십여 년 전 그 해맑은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나서는, 남편이 나이 들어서까지 공부하느라 집도 아이도 아직 없다며 상도동 언덕배기에 있는 전셋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소박한 밥상을 차려 주었다.
세월은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취향까지 나도 모르게 바꾸어 놓는 것일까……무대 위에서 환한 조명을 받는 주인공보다 무대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는 사람들이, 화려한 꽃다발 보다 들판 바람 속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들꽃 무더기들이, 반짝이는 크리스탈 화병 보다 이끼 낀 장독대의 투박한 장독들이 더 아름다워 보이고, 정갈하고 소박한 밥상과 골목길의 정겨운 담장들, 서로 별 다른 대화 없어도 편한 사람이 좋아지니 말이다.
어느 가을인가 그 친구와 나는 시장에서 모과를 사다가 얇게 썰어서 설탕을 켜켜이 재워 유리병에 담아 놓고 겨우내 달콤하면서도 신 맛이 입안 가득 퍼지는 향긋한 모과차를 마신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이후로 따뜻한 겨울 나기를 위한 나의 월동 준비는 모과차 만들기였는데, 여기 미국에서는 모과를 구할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행복하냐고 묻는 나에게 예전처럼 피식 웃으면서 인생 별거 있냐……사는 게 다 그렇지……우문현답 하던 그 친구……바구니 속의 은은한 모과 같은 그 친구가 이 가을 날 문득 보고 싶어진다.
고픈 배를 안고 막막한 멍에의 밭을 다 갈고 어둠 속으로 느리게 돌아와 참 달게 밥을 먹고 싶다는……누렇게 앓아 누워있다 부시시 일어나 단지 살아 있음을 기뻐하고 싶기에, 그래서 차라리 부황들고 싶다는 시인의 가난한 마음을 아름다운 가을날 나도 따라가 본다. 조금 모자라고 단순한 웃음으로, 빈 뱃속처럼 사람 좋은 얼굴로 사람들 깊숙이 들고 싶다는 시인을 한번도 만난 적 없지만 왠지 그에게서는 울퉁 불퉁 못 생겼지만 방에 가져다 놓으면 오랫동안 맑고 향긋해서 자꾸 가까이 두고 싶은 모과 내음이 날 것만 같다.
차가운 바람 많이 부는 날, 그리움처럼 아득히 오는 얼굴과 햇볕 잘 드는 창가에 마주 앉아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향긋한 모과 차 한잔 마셨으면…… 한없이 작아지고 낮아지고 가난해지고 싶은 가을이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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