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바시장과 한인들 <4>
전체업소 80%장악… 렌트·키머니 ‘복병’
자바시장은 북쪽으로 올림픽, 남쪽은 14가, 동쪽은 스탠포드, 서쪽은 로스앤젤레스 길 안에 형성돼 있으며 이 지역에 산재한 의류업소중 한인업소 수는 800여개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주변 지역에 있는 업소들까지 합하면 대략 1,200여개의 한인업소가 의류업에 종사하고 있다. 원단에서부터 실과 단추를 파는 세일즈맨들, 그리고 완제품을 구입하려는 손님들로 분주한 자바의 80-90%를 한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셈으로 한인사회 경제력의 한 단면이자, 아메리칸 드림을 향한 한인들의 끊임없는 도전이 이루어지는 삶의 현장이다.
<키머니는 한인 의류업계 발전에 발목을 잡는 대표적인 불안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한인들이 키머니를 없앨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60년대 한국산 셔츠 수입 의류업 효시
80년대 전성기 거쳐 1,200여 업소 달해
자체상가 개발 등 자구책 마련 몸부림
한인들의 의류업 진출은 1960년대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올드 타이머들에 따르면 남궁봉씨가 196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와이셔츠를 수입, 잉글우드의 한 백화점에 납품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중앙은행 이사인 김상훈씨가 70년대에 한국 대우에서 생산한 의류를 수입했다.
물론 이들이 자바시장에서 직접 의류를 생산한 것은 아니며, 실질적인 한인들의 의류업 진출은 19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인의류협회(회장 명원식)에 따르면 1977년 현재의 앨리에 탑 스타일과 이본 오브 캘리포니아란 업소를 시작으로 한인들의 의류업 진출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 당시는 한인봉제업계가 이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시점으로 의류업 진출이 발판이 됐다는 의견들이 적지 않다.
이후 80년대 중반부터 한인 의류업체가 급증하면서 자바시장은 새로운 활기를 얻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에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출신 한인들의 영향도 컸다.
초기 업소로는 표경만씨가 세운 ‘엠파이어 오브 캘리포니아’, 최윤해씨의 ‘퍼스트 초이스’, 성낙범씨의 ‘핫 앤 더 갱’, 임종칠씨의 ‘엘도라도’ 등이 있다.
한인업소가 급증하자 1989년 한인업주간의 친목과 권익을 위한 조직이 탄생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 한인의류협회의 전신이 ‘한인 의류도매인협회’로 김인씨가 초대회장(2대까지 연임)을 맡게 된다.
이후 의류협회는 강상호(3대), 안영복(4대), 김인호(5대), 주영기(6대), 이화천(7대), 잔서(8-9대), 한계환(10대), 강용대(11대), 신남호(12대), 강용대(13-14대), 이윤동(15대), 최대호(16-17대), 마이크 리(18대), 명원식(19대·현 회장)씨 등 14명의 회장을 배출했다.
한인 의류업계의 경제적 파급효과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통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인업소들이 부담하는 렌트비에서 각 의류업체 및 관련 하청업체, 관련 서플라이 업체들의 매출 등을 포함한 실제적인 경제효과는 연간 50억달러에 이를 것이란게 한인들의 주장이다.
그만큼 돈의 흐름이 많고, 성공한 업소들의 수익이 다른 비즈니스에 비해 훨씬 커보이다 보니 일부 한인들은 자바진출이 곧 돈이란 막연한 기대와 오판으로 적지 않은 돈을 투자했다가 얼마 되지 않아 낭패를 보는 경우들이 심심치 않게 목격되는 것이 이곳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명원식 회장은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오너가 유행의 흐름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감각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며 “의류시장은 사실상 무한대라고 볼 수 있고, 히트 상품이 터지면 큰 돈을 벌게 되지만 이는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환경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경영능력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한인의류업계는 자바 진출 20여년만에 외형적으로 큰 성장을 이뤘지만, 항상 가슴속에 부담을 안고 있다. 다름아닌 높은 렌트비와 키머니(일종의 권리금)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 1990년대 중반 불어 닥친 패소화 폭락사태 이후 장사가 예전같지 않은데 비해 렌트비가 멈출 줄 모른채 계속 올라가고 있다는 것.
이 때문에 일부 한인들은 단독 또는 공동투자를 통해 건물매입에 나서기도 했지만, 건물을 내놓는 주인들이 없어 거래 자체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건물주들의 입장에서 빈 공간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데다 키머니란 짭짤한 부수입까지 얻는 마당에 굳이 건물을 매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한인업주들은 과중한 렌트비와 키머니를 해결하기 위한 실력행사와 자구책 마련에 나섰지만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1995년 한인들은 일제히 업소문을 닫고 렌트비 인하를 요구하는 침묵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1999년에는 키머니를 없애자는 대규모 시위를 벌인 끝에 2002년 이를 규제하는 법이 마련됐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키머니 고착화에 한인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과, 여전히 한인들이 목이 좋은 장소를 얻기 위해 이를 지급하고 있다는 것. 결국 법이 있어도 스스로 이를 지키지 않는 모순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대규모 상가개발 계획도 추진됐다. 아예 건물을 지어 렌트비와 키머니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2001년부터 신남호씨 등이 주축이 돼 모인 40여명의 투자가들은 2,000만달러의 펀드를 마련, 샌피드로와 14가에 위치한 LA통합교육구 부지 매입을 추진했다. 이것이 성사되면 500여 업소가 들어설 수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이들은 20여만달러를 들여 사업계획 등을 만들어 교육구와 LA시를 접촉했지만, 교육구측의 소극적인 자세로 성사되지 못했다.
한인들은 여전히 교육구 부지 개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명 회장은 “지금도 한인들이 뜻을 모아 공동 투자한다면 가능하다고 본다”며 “지속적인 로비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자바시장의 한인들은 한인 의류업계가 한단계 더 발전하기 위한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제품의 브랜드화, 그리고 유통망 확보가 관건이 될 것이란 지적이다.
실제로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의류업계의 운영방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 양상이다.
하나는 기존의 방식처럼 도매상으로 운영하는 것이고, 또다른 것은 주류시장 진출을 적극 모색하는 것이다.
주류시장 진출에 대표적인 기업으로 ‘포에버 21’(대표 장도원)이 손꼽히고 있으며 이 업체는 지금도 세를 확산시키고 있다.
자바시장은 요즘 조용한 세대교체가 진행중이다. 특히 이곳에서 자란 1.5-2세들이 가업을 이어받으면서 새로운 운영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1세들은 “우리는 주류시장과의 거래에서 영어가 큰 장애가 됐다”며 “이들의 유창한 영어가 주류시장 진출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될 것이며 여기에 자본력까지 조화를 이룬다면 새로운 성장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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