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바시장과 한인들 <3>
의류업계 발전에 활력 ‘파울리스타’
1963년 2월 브라질 상파울루 인근 산토스 항구에 92명의 동양인들이 도착했다. 배를 타고 인도양과 아프리카 최남단 케이프타운을 돌아 낯선 땅에 도착한 이들은 다름 아닌 한국인 농업 이민자들이었다. 이후 기술이민 등으로 70년대에도 한국인들의 브라질 정착은 계속됐지만, 그들은 대부분 대도시로 진출, 의류업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경험과 재력이 사실상 전무한 상태에서도 한국인 특유의 끈기와 노력으로 의류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브라질에서 모은 재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80년대 LA 다운타운에 진출하며 현재의 자바시장에 한인들이 뿌리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파울리스타’(상파울루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라고 부른다.
<브라질 이민자 출신들은 현재의 자바시장에 한인들이 깊이 뿌리를 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 파울리스타협회 회원들이 연말 모임을 갖고 있다.>
60~70년대 브라질 농업·기술 이민 1세대들
집에서 의류업 시작… 재력·경험 축적
80년대 LA진출 활기, 한때 3백여 업소 달해
‘중간 도매상’이란 의미인 ‘자바’라는 말은 의류업계를 지칭한다. 명원석 한인의류협회 회장에 따르면 다운타운 자바시장에 진출한 한인업소는 현재 1,200여곳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인사회 경제의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인 한인 의류업계가 자바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브라질 출신 한인 의류업 종사자들의 역할이 컸다.
브라질로 이민 갔던 한인들은 초기 야채 및 과일장사가 주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인들은 의류업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당시 브라질에서도 의류업은 유대인들이 거의 독차지 하고 있었다.
한인들이 의류업에 종사하게 된 배경은 아주 단순하다.
무엇보다 돈되는 사업이라는 것이 가장 컸고, 언어와 문화가 다른 땅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시작은 집에서였다. 유대인 업소에서 일해주며 기술을 배우고, 일감을 가져와 밤새는 줄 모르고 일을 했다. 그리고 조금씩 독립해 나가면서 미약하지만 직접 옷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때도 한인들의 뛰어난 눈썰미와 하루 15시간이 넘게 쉼없이 일하는 근면성은 큰 힘을 발휘했다. 유행 디자인이 있으면 곧바로 카피했고, 밤새 만든 옷을 자동차에 싣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3개월 외상으로 팔았다. 심지어 물건을 팔기 위해 2,000킬로미터나 떨어진 타도시까지 차를 몰고 가기도 했다.
이후 상파울루의 의류상 밀집지역인 봉헤찌로에 하나 둘씩 업소 문을 열기 시작했고, 블라스 지역까지 상권이 확대되면서 80년대 중반에는 한인업소만 300여곳을 훌쩍 넘어섰다.
<1960년대 후반 의류업에 나선 브라질 한인들.>
한인들이 만든 의류의 우수한 품질과 디자인이 알려지면서 브라질 인근 볼리비아와 칠레, 페루, 파라과이에서 주문이 이어졌다.
거칠 것 없었던 브라질 경제도 한인들에겐 큰 힘이 됐다. 한인들은 매일 아침 전날 매상을 암달러상을 통해 달러로 바꾸는 게 하루의 중요한 일과였다. 물론 이 배경에는 상당수 한인들이 자신들의 최종 정착지를 미국에 두고 있었던 영향도 컸고, 당시 미국의 이자율도 높았기 때문이었다.
목돈을 손에 쥐기 시작한 한인들은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LA로 달러를 송금했고, 한인 은행가의 원로인 정원훈씨와 한미은행 설립에 참여한 조지 최씨 등 LA지역 한인은행 관계자들이 직접 브라질까지 날아와 투자 설명회를 열며 브라질 한인들의 돈을 유치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브라질 한인들은 현재의 LA 한인타운이 만들어지고, 한인은행들이 발전할 수 있었던 젖줄이 자신들이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반면 그 당시 엄청난 현금 동원 능력을 갖고 있던 자신들이 은행 하나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에 후회를 하는 사람들도 그들이다.
실제로 관계자들에 따르면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2,000만달러 정도는 쉽게 모을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브라질 출신 한인 중 김인배씨가 현지에서는 가장 사업을 크게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LA한인회 이사장을 지낸 강상윤씨, LA평통회장을 지낸 신남호씨, LA충청향우회장을 역임한 한정근씨, 가든그로브에서 염색업체를 운영하는 김동일씨, 동서지간이었던 김근선·신계후씨, 김동일씨와 고교동문인 나계성씨, 한인타운내 호텔을 소유했던 이영근씨, 김창휘씨 등이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브라질 한인들의 LA 진출이 급증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브라질에서 얻은 경험과 재력, 그리고 뛰어난 패션감각을 바탕으로 발빠르게 자바시장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초까지 절정을 이뤘다.
브라질에서 가장 먼저 LA에 정착한 그룹 중 한 명인 강상윤씨는 “1980년 브라질에서 미국에 들어왔을 때 은행 이자율이 15%나 돼 브라질 한인들이 보낸 돈들은 절로 늘어나고 있었다”면서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다운타운 자바시장에 들어선 이후 수만달러어치의 물건을 큰 비닐백에 담아 구입자에게 건네줄 정도로 장사가 잘 됐고, 이같은 LA 소식들이 브라질에 전해지면서 한인들의 미국행이 줄을 이었다”고 말했다.
김동일씨도 “그 당시 브라질 한인사회 분위기는 ‘너도 가니? 나도 간다’ ‘너만 100만달러 예치했냐? 나도 있다’는 식일 정도로 미국행이 줄을 이었다”고 전했다.
그만큼 돈과 경험을 갖춘 이들은 무서울 게 없었고, 이미 LA에는 사업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자금을 예치해 놓은 터였다.
한때 브라질 출신 한인들의 업소만 300여곳을 훌쩍 넘었고, 자신들만의 친목단체인 ‘미국 파울리스타협회’ 1년 예산이 10만달러를 넘을 정도였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브라질 출신 한인들의 사업은 하향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경기하락에다 페소화 폭락, 그리고 시장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또 부동산 등에 공동이 아닌 나홀로 무리한 투자방식을 선호한 것도 원인이 됐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브라질식 사업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파울리스타 관계자는 “옷 장사만 알았지 다른 것을 너무 몰랐던 것 같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비록 10여년 전에 비해 다소 수는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현재 자바에서 영업중인 브라질 출신 한인 사업체수는 약 200여곳으로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 일부 업체는 1세대가 은퇴하고 자식들이 물려받는 세대교체도 진행중이다.
현재 파울리스타 중 임승훈·승춘 형제와 김용일씨 등이 여전히 사업을 크게 하고 있으며, 신남호씨는 의류업과 함께 중국에서 부동산 개발업에 진출해 성공을 거두고 있다.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