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한 일은 제 각각이지만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물이나 적을 물리치는 업적을 세운 점이다.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르를,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외디푸스는 스핑크스를 죽였고 헤라클레스의 12가지 위업도 대부분 괴물을 때려잡는 것이다. 일리아드의 주인공 아킬레스는 헬렌을 납치해 간 트로이를 멸망시켰다.
이들의 또 하나 공통점은 끝이 비극적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살해되거나 노상에서 객사했다. 편안히 노후를 맞은 영웅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킬레스가 트로이로 떠나기 전 “전쟁에 참가하지 않으면 오랜 여생을 즐기겠지만 이름 없이 죽을 것이며 참가하면 요절하지만 불후의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란 신의 계시를 받는다. 잠깐 동안은 전쟁을 피해 보려 하지만 그는 결국 “짧고 굵게“ 사는 길을 택한다. 영웅은 업적을 위해 자기 생명까지 바치는 사람이란 그리스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영웅의 삶이 평범한 인간들보다 나은 것인지는 의문이다. 일리아드의 후편 오디세이를 보면 오디세우스가 하데스로 내려가 죽은 아킬레스와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 데 이 때 아킬레스가 하는 말이 “땅에서 노예를 하더라도 이곳에서 왕 노릇 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뭐가 나은지는 알 수 없지만 영웅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만은 틀림없다. 한국인의 최대 영웅 이순신 장군만 봐도 그렇다.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가장 위대한 3대 대통령으로 꼽히는 워싱턴, 링컨, 프랭클린 루즈벨트 중 2명이 직무 수행 중 사망했다. 워싱턴은 재직 중 이룬 업적 못지 않게 더 할 수 있었는데도 스스로 물러났다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그러나 재직 중 사망했다고 무조건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죽기 전 어느 정도 업적을 남겨놓아야 “저 사람이 더 살았더라면 얼마나 많은 일을 했을까” 하는 소리를 듣는다. 남북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죽은 링컨이 대표적인 케이스고 쿠바 미사일 사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은 후 젊은 나이에 횡사한 케네디도 그렇다. 반면 1881년 정신병자의 총에 맞아 죽은 제임스 가필드나 1901년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암살된 윌리엄 맥킨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죽는 바람에 아무 일도 못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암살 당할 뻔했다가 살아났다는 것만으로도 준 영웅 대접을 받는다. 전쟁 영웅으로 첫 암살 위협을 받은 대통령인 앤드루 잭슨은 1835년 지근 거리에서 발사된 총탄이 빗나가 살아나자 들고 있던 지팡이로 범인을 때려잡아 유명해졌다. 시오도어 루즈벨트는 1912년 유세 중 총격을 받았으나 100페이지나 되는 연설문을 양복에 넣어뒀다 총알이 여기를 관통해 몸에 박히는 바람에 살아났다. 그는 총에 맞고도 끝까지 연설을 마쳐 “역시 사내 대장부”란 평을 들었다. 최근에는 레이건이 1981년 힝클리의 저격을 받고도 “피하는 것을 깜박 했어” “의사가 공화당원이면 좋겠는데...”라는 여유 있는 농담으로 담박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국에서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가 괴한의 칼부림으로 얼굴에 60 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박근혜 개인으로 보면 불행이지만 정치적 손익 계산서를 따져 보면 뜨는 용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나 다름없다. 가뜩이나 “세련되고 안정적인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굳혀가고 있는 판에 이제는 “칼끝도 뚫지 못한 철의 여인”이란 상품으로 포장되게 생겼다.
거기다 “부모를 흉탄에 잃고 자신도 칼 세례를 받은 박근혜를 한번 밀어주자”는 동정표까지 몰리면 청와대 입성도 힘들지 않아 보인다. 가뜩이나 일이 안 풀리는 판에 이런 일까지 터지자 열린 우리당은 초상집 분위기라고 한다. 죽어야, 죽을 뻔해야 영웅이 되는 정치판의 생리는 참으로 묘하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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