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대통령이 지난 1996년 9월14일 로자 팍스에게 대통령 자유훈장을 수여한 후 악수를 나누고 있다.
타계한 로자 팍스는
디트로이트에서 25일 타계한 ‘민권운동의 어머니’ 로자 팍스는 1913년 2월 앨라배마의 터스키기에서 로자 루이스 맥컬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제임스 맥컬리는 목수였고 어머니 레오나는 교사였다.
그녀가 자라고 성장한 앨라배마는 남부지역 중에서도 인종차별이 심했던 지역.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팍스는 젊은 시절 흑인 유권자 등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43년에는 전국유색인종 지위향상협회에서 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팍스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녀가 42세였던 1955년 12월의 일. 당시 재봉사였던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 앞좌석에 앉았다. 그때만 해도 흑백구분이 분명했기에 버스 앞좌석은 백인 승객들의 전용칸이었다. 팍스는 후일 당시를 회상하며 “그날 저녁 버스에 탔을 때 내가 혁명을 초래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백인 운전사가 우리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명령했을 때 마치 겨울밤 이불이 몸을 훈훈하게 감싸는 것처럼 뜨거운 결의가 내 몸을 덮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운전자의 좌석 양보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경찰에 체포됐다. 그녀가 체포되자 당시 26세의 청년 목사였던 마틴 루터 킹이 버스 승차거부 운동을 조직했는데 이 운동은 장장 381일간 계속됐다. 킹 목사가 주도한 승차거부 운동은 연방대법원이 몽고메리의 인종분리 버스 서비스는 위헌이라는 하급법원의 판결을 확인할 때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다.
팍스는 이후 주변의 협박을 견디지 못해 미시간주로 이주했고 그 곳에서 삶을 마감했다.
팍스는 민권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자유훈장과 의회 황금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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