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대한야구협회 허곤 명예회장이 자신의 야구스승인 이영민이 불세출의 스타 베이브 루스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이의헌 기자>
한국야구 역사 산 증인 허곤 야구협 명예회장 스토리
오늘부터 메이저리그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이 시작된다. 한인 야구팬들에게 2005년은 특별한 해다. 한국야구가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한국야구사의 산 증인인 재미대한야구협회 허곤(80) 명예회장의 야구인생 스토리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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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9월2일 대구에서 출생한 야구인 허 곤. 대구수창 공립 보통학교 5학년 때 학교 대표선수로 선발된 그는 같은 해 팀을 대구시내 보통학교 야구대회 우승으로 이끌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만수·장효조·양준혁을 배출한 야구 명문 대구 공립 상업학교(현 상원고)가 그의 모교. 허곤은 2학년 때부터 학교대표로 선출돼 전국대회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졸업 후 조선식산 은행에 입사,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던 그가 다시 야구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해방직후. 해방기념 대구시내 선수권 대회에 대구상업 O.B 팀의 일원으로 출전, 우승컵을 차지하면서부터다.
허곤이 다시 야구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은행 선배이자 스승인 한국야구의 영웅 이영민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이영민은 허곤보다 21세나 연상이었지만 조선식산 은행 배터리로 호흡을 맞추며 1946년 제1회 전국도시대항 야구대회와 한성 실업야구 추계 1차 연맹전 우승을 이끌며 대구야구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두 사람은 같은해 조선야구협회 창설도 주도했다.
1948년 조선금융조합연합회(현 농협) 야구단 창단 멤버로 입단한 허곤은 이듬해 팀을 제7회 춘계한성 실업야구 연맹전과 제4회 전국실업야구 연맹전 우승으로 이끈다.
6.25 직전 공군소위로 임관한 허곤은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952년 공군 야구부를 창단했고 1953년 4월에는 서울수복기념 육해공 3군 야구대회를 개최해 전쟁으로 끊겼던 야구사의 맥을 이었다.
1954년은 허곤에겐 잊을 수 없는 해. 8월12일 그의 스승이자 야구계의 큰 별인 이영민이 괴한의 총에 맞아 타계한 슬픔을 안고, 12월 필리핀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에 대표선수로 참가, 3위에 입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의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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