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좌익 운동가들
무장투쟁 혁혁한 행적
2) 숨겨진 독립운동
미주 한인들은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후 35년간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안창호의 흥사단은 ‘계몽과 교육’, 이승만의 동지회는 ‘외교’로 일제에 대항해 왔다. 그러나 ‘붉은 물감’의 덧칠 속에 60년 동안 역사책 속에서 빛이 바래진 존재들이 있다. 그동안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좌파’독립운동가들의 항일사를 재조명해 봤다.
미국 대일수출 반대
롱비치서 격렬 시위
미군 OSS 대거입대
무력·선전전 병행
신한민보는 1938년 8월17일 LA에서 벌어진 항일투쟁을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한인들이 미국 고철의 일본 수출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롱비치항에서 벌인 것이다. 이는 LA타임스와 중국계 신문에도 소개되며 한인사회의 항일의지를 만방에 과시했다. 이 시위의 주도세력은 대한인국민회의 좌파 세력인 ‘금요토론회’ 회원들이었다.
좌파 독립운동세력이 미주 독립운동사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30년대.
초기 흥사단, 대한인국민회의에서 활동한 이들은 무장투쟁 지원 등 항일투쟁의 방향을 놓고 내부 이견을 보인 채, 1930년대 후반부터 중국후원회, 조선 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으로 독자 노선에 나선다.
이경선, 김강씨 등 사회참여의식이 강한 감리교인으로 구성된 이들이 좌파로 행보를 옮긴 것은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낸 대공황과 뉴딜 정책으로 점철된 1930년대 시대상의 반영으로 해석된다. 이들 중 일부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온건파로 남았지만 또다른 이들은 기독교를 버리고 공산주의로 전향, 천상 낙원대신 지상 낙원을 꿈꿨다.
좌파 계열의 투쟁은 연합군에게 한인의 투쟁의지를 보여주는 군사행동과 이를 홍보하기 위한 선전전으로 이뤄졌다.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최연소 회원이던 선우학원 박사는 “연방정부 산하 전쟁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의 동양부 담당자가 이같은 방식을 제안해 대부분이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들은 1940년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기관지인 ‘의용보’, 1943년 ‘독립’등 신문을 창간해 선전전에 힘을 쏟았다. 또 미군 OSS에 대거 입대, 조선의용대에 대한 자금 지원 차원을 넘어 직접 항일 무력투쟁에 합류했다. 일부는 미주 한인의 한국 침투를 위한 ‘납코(NAPKO)계획’에, 일부는 한국광복군 국내 침투 작전인 ‘독수리 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5년 마침내 광복을 맞았지만 이들의 독립운동사는 ‘냉전’이란 예기치 못한 현실에 떠밀리며 점차 ‘잊혀진 존재’가 돼 갔다.
대한인국민회 시절부터 반 이승만 성향을 보인 이들은 광복 직후, 어쩔 수 없이 대거 북한행에 나서 한때 요직을 차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미국 출신이란 이유 때문에 공산사관의 부족 등을 이유로 비판을 당해야 했고 한국전쟁 직후에는 ‘미제간첩’으로 몰려 숙청까지 당했다. 또 미국에서도 이들의 독립운동사는 ‘빨갱이’란 색깔론 속에 누설하지 말아야 할 금기가 된 채 잊혀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좌파 독립운동가 이경선(위쪽)과 김강씨.
<이석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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