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한인 이민 100주년
1905년 5월14일 전국에서 모여든 멕시코 첫 이민자 275가구 1,033명은 멕시코 남부 유카탄 반도의 카리브해 연안 살리나크루스 항구에 도착했다. 간단한 환영식까지 받으며 이국생활의 달콤한 꿈에 한껏 젖어있던 이들은 곧이어 짐승만도 못한 애네켄 농장 농노로 전락하며 한 많은 멕시코 이민의 첫 장을 열게 된다. 미국으로 향한 첫 이민자들이 하와이에 도착해 미국 이민의 첫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지 2년 후의 일이었다. 올 5월14일이면 멕시코 한인 이민사가 100년을 맞는다. 멕시코에서는 수년 전부터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조직해 100년 이민사를 정리하는 각종 사업을 구상하는 한편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 받아온 멕시코 한인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한인회관 건립, 한글학교 설립 등 뿌리 찾기에 전력하고 있다.
메리다에 살고 있는 펠리시아 산체스(오른쪽)가 아버지 안토니오 산체스의 영정을 들도 미소짓고 있다.
메리다에 거주하는 멕시코 한인 이민자 후손들.
멕시코시티 코리아타운에서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한인 상인들.
노예생활 초기 이민자‘가난 대물림’
“2차 이민자와 괴리감 없애자”
한글학교 건립등 대대적 행사 준비
▲멕시코 한인사회의 현주소
멕시코 이민은 크게 두 가지 가닥으로 나뉜다. 1905년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 남쪽으로 2시간반 비행 거리의 카리브해 연안 유카탄 반도에 도착했던 첫 이민자들의 후세들과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시작된 유학생, 기술자, 태권도 사범 등 2차 이민 1세대들로 구분된다.
현재 5세대까지 이어지는 첫 이민자 후세들은 대부분 열악한 환경 속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가 70년이란 이민 단절의 괴리가 커 최근에 이주한 이민자 그룹들과 별다른 교류 없이 유리된 채 살아오고 있었다. 최근 들어 신이민자 그룹 한인들이 이민 후세들을 보듬으며 이들에게 한민족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심어주는 노력으로 기울이는 상태다.
현재 3만5,000여명으로 추산되는 첫 이민그룹 후손들은 그동안 자연스레 멕시코인이 돼버렸고 세습된 가난에 허덕이며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 이같은 빈부격차와 역사적 단절이 두 이민 그룹을 서로 딴 나라 사람 보듯 살아가게 만든 것이다.
이에 멕시코 한인사회는 한인회를 중심으로 해마다 5월1일을 한인의 날도 정하고 이민자 후세들을 초대해 동질성 회복에 나서고 있다. 올해는 멕시코시티 대학 운동장에서 1,200명이 모여 한국의 날을 즐기기도 했다고 현지 관계자들이 전했다.
▲1905년 첫 이민자
1904년 4월 일본 동양척식회사의 사기에 말려 이민선에 오른 1,033명의 이민자들은 30여일의 항해 끝에 멕시코 남서부 태평양 연안 살리나크루스에 도착했다. 이들은 모두 4년만 일하면 큰 돈을 벌어 금의환향할 것이라는 꿈에 젖어 있었다. 항구에 내린 이들은 다시 화물차와 화물선에 실려 유카탄 반도의 주도인 메리다와 그 주변 마을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노예로 팔려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배의 밧줄로 사용되는 애네켄 농장으로 뿔뿔이 팔려가 국교는커녕 인적 왕래조차 없던 라틴 문화권에서의 처참한 이민생활을 시작한다.
1907년 멕시코 유칸탄주 메리다시에서 태어나 멕시코 한인 이민사의 산증인인 고흥룡(96)씨는 최근 한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한인 노동자들이 악독한 농장주들의 채찍 아래 짐승처럼 학대당하고 비참하게 갔다. 멕시코 이민의 슬픈 역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서글프다”고 말했다.
농장주들에게 저임금과 폭행에 시달렸고 견딜 수 없어 도망을 하다 잡히면 발목을 잘리기도 하는 등 학대와 수난을 겪었다.
노예계약이 끝난 후에도 이들은 한일합방으로 돌아갈 조국이 없어져 절망 속에서 현지에 동화돼 갔고 교육은 전혀 받지 못해 가난은 대물림으로 이어졌다.
후손들이 아직도 비참한 가난 속 허덕이며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민 2~3세대중 학교 교육을 아예 받지조차 못한 한인들이 대부분이고 최근 들어서야 고등교육 기회를 얻은 후세들이 나올 정도로 열악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도 메리다시 인근 온칸 마을에는 1,000여명의 한인 후손들이 한국의 성을 간직하며 움막이나 다름없는 집에서 기거하며 가난과 무지 속에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 12년만에 재결성된 멕시코시티 후손 한인회가 재발족돼 신임회장을 다비드 김(66·회계사)씨를 신임 회장으로 뽑았다. 한인회는 사무실을 마련하고 회보도 발행해 강한 후손 한인회를 꾸려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첫 이민자들의 후손들이 모두 가난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찍이 농장을 뛰쳐나와 교육에 매진한 선조들의 후손들은 의사, 변호사, 공무원, 일반 사무직, 자영업 등 나름대로 생활기반을 잡아 열심히 살아간다.
▲1960대 후반 이민자
첫 이민 세대 이후 60여년간 멕시코 이민은 중단되고 만다. 이민이 재개된 것은 70년대 이후로 기술자, 태권도 사범, 유학생들이 멕시코 정착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수가 많지 않아 80년대 초반만 해도 500여명에 불과했었다. 멕시코에 한인 유입이 본격화 된 것은 한국의 IMF 사태 이후. 98년 한국에서 수천명이 입국했고 99년과 2,000년에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과테말라 등지에서 5,000명 이상이 이주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현재는 최소 1만5,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멕시코 주재 한국대사관은 멕시코시티를 포함한 멕시코 전역의 한인은 최근 20년 사이 이주한 2만여명과 1900년 초반 이주해온 한인들 및 원주민 혼혈까지 합쳐 약 4만~4만5,000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멕시코시티에도 고급 번화가인 소나로사를 중심으로 코리안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식당, 비디오, 제과점, 미장원 마켓 등이 모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소규모 코리아타운이다.
멕시코 시티의 한인업소는 의류가 600여곳(80%), 잡화 60여곳(10%), 및 식당 10여개, 여행사 7개, 미용실 5개, 옷가공 수출업체 40여개 정도 산재해 있다.
그러나 현지 멕시코인들의 한인에 대한 나쁜 평판은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한인들은 돈을 벌면 미국이나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악의적 소문이 그 한 사례다. 실제 IMF 이후 한인들이 집단으로 세무사찰을 당하는 가 하면 수년 전에는 중무장한 멕시코 경찰들이 의류상가 일대를 포위하고 한인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 연행해 간 사실도 있었다.
▲기념행사
멕시코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회장 서동수)는 2월 애네켄 농장의 본산지 메디나시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 계명대학 무용팀의 한국 전통무용 공연에서부터 태권도 시범, 그리고 한국 연극 극단의 멕시코 이민자를 소재로 한 모노 드라마 등 정체성 확립과 한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대규모 행사다. 또 한국 정부에서도 지난 1월 멕시코 한인 이민 100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외교 통상부와 문화관광부, 국방부, 국제교류재단, 재외동포재단, 국제협력단과 협조해 멕시코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을 펼치기로 하고 우선 100만달러를 들여 유카탄주에 병원을 설립하기로 했다. 또 이민 100년사 편찬과 100주년 기념비도 건립하고 사진 전시회, 기록영화 제작 등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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