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5.18 광주시민항쟁을 다룬 한국 영화를 한 편 볼 기회가 있었다.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폭도’로 몰린 피해자의 입장에서 ‘광주사태’를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한국에서도 제법 화제를 불러모았던 영화로 알고 있다.
영화의 도입부는 보스의 명령에 따라 광주로 노름빚 수금을 나갔던 얼치기 건달이 폭도로 몰려 정보계 고참 ‘비리 형사’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는 장면들로 채워진다. 형사는 주인공이 ‘폭도’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무자비하게 고문해 끝내 성 불구자로 만들고 만다.
형사는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주인공을 삼청교육대로 넘기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한테 개인 감정 따윈 없어. 그러니까 내가 ‘I am sorry’하고 네가 ‘It’s OK’하는 걸로 우리 관계는 깨끗이 끝나는 거야.”
누군지는 몰라도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광주사태라는 상황을 빌어 가공할 공적 폭력의 그늘 밑에서 형성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일방적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광주사태라는 역사적 사실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사람과 사람, 개인과 집단, 혹은 조직과 조직 사이의 일방주의적 관계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1981년 5월의 광주로 상징되는 야만성이 이 영화의 톤을 결정하는 극적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기에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가 더욱 뚜렷이 드러난 게 사실이지만, 광주 대신 이라크를 상황요소로 대입한다 해도 영화 전체 흐름은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
부패한 형사와 폭도로 몰려 불구자가 된 건달을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의 미군 교도관과 이라크인 포로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허구에 바탕해 이라크에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을 가한 미국과, 분명 ‘양아치’이긴 하지만 미국이 주장하는 중죄를 범하진 않은 이라크를 의인화시켜 등장인물 자리에 대신 앉힌다 해도 전체 구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잘 뜯어보면 이 영화에서 ‘I am sorry’라는 한마디 말로 자신이 가한 폭력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형사는 다수파와 소수파, 친미와 반미 세력간의 파워게임으로 내전위기로 몰린 이라크에 선심 쓰듯 주권을 이양해 이라크 불똥이 11월 대선으로 옮겨 붙지 못하도록 차단하려는 부시 대통령을 연상시킨다. 다른 게 있다면 부시 대통령은 아직까지 억울한 피해를 입은 이라크 국민과 명분 없는 싸움으로 숨진 미군의 유족들에게 ‘I am sorry’라는 ‘빈말’조차 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요즘 미국에서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을 신랄히 비난한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 9/11’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영화에서 무어 감독은 그야말로 작심한 듯 부시 대통령을 두들겨 댄다. ‘화씨 9/11’을 제작한 미라맥스사와 영화 배급계약을 체결한 디즈니가 감짝 놀라 발을 뺏을 정도면 무어 감독의 ‘부시 때리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화씨 9/11’이 지독한 정치적 편파성에도 불구하고 올해 프랑스 칸느 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차지한데 이어 흥행 면에서도 대성공을 거둔 것을 보면 국내외에 형성된 반 부시 공감대가 넓긴 넓은 모양이다.
화씨 9/11은 분명 균형감각을 상실한 작품이다. 부시 정권을 일방적으로 난타하지만 다큐멘터리의 요체인 객관성과 균형성을 무시한 바로 그 일방성 때문에 영상매체를 수단으로 한 또 다른 폭력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어 감독의 화씨 9/11은 관객들로 하여금 강요된 편협성과 일방성이 얼마나 위험하고 치졸한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럭저럭 볼만한 작품이다.
이강규<부국장 대우·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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