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BBLED ISLAND
최 정<화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작업실로 가는 길은 매일이 새롭다. 공항 앞을 지나 잠시 달리면 길은 동쪽으로 둥그렇게 휘면서 방향을 틀다가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오른 편으로 베이가 다가든다. 늘 보는 풍경인데도 매일, 탁 트이는 바로 그 순간은 희열, 바로 그 자체이다. 바다는 매일 그 색이 달라 맑은 날은 카리비안해의 푸르른 옥색을 상기시키는 눈부신 산호 빛이다가, 조금 더 밝은 날은 의외로 회색이 진한 푸르름이었다가, 때론 얇은 얼음을 상기시키는 투명한 은빛이다가.. 했다. 거기에 바람이 부는 날은 물 비늘이 자박자박 소리라도 내듯 비껴 오르고, 떼를 지어 날다가, 혹은 물위에서 쉬다가.. 하는, 새들의 모습, 또한 새롭다.
그 기쁨은 늘 새로워 모퉁이를 도는 순간, 오늘은 어떤 색의 바다가 날 맞아주려나, 하는 설레는 기대를 갖게 된다. 몇 차례 스튜디오를 바꿔 이사를 다니다 지금 있는 스튜디오에 닻을 내리게 된 것도 실은 바다 때문이었다. 작업실의 창가에 서면 바다가 보인다. 창은 통채로 창살을 들어 올려야 열리는 오랜, 구식의 창이어서 내 작은 키로 바다를 즐기려면 서 있을 수 밖에 없어 아예 술집에서 쓰는 높은 의자를 장만했다. 음악을 틀어놓고 의자를 창가에 기대어 놓고 앉아 바다를 바라볼 때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그 호젓하고 작은 공간이 날 받아주고 있다는 느낌은 충족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오후 서너 시경, 바다는 가장 짙고 푸르러진다.
삶에서 한창 정력적으로 일하는 나이처럼 오후의 바다는 힘이 넘쳐 진한 모습이다. 그러다 조금씩 해가 기울고 어둠이 다가설 때, 조금씩, 조금씩 갈아 앉는 색조... 물안개라도 피어오르는 저녁이면 더더욱 신비롭고 고즈넉하다. 그런 시간에 나는 종종 내가 살아온 삶과 그 속에서 변화되어온 나의 그림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젊었을 때, 많은 것을 바라고 많은 것을 탐하던 시절, 그 시절은 그 많은 꿈과 욕망이 가눌 수 없이 무거웠었다. 구체적으로 가려낼 수 없는, 복잡하고 애매한, 그러나 불덩이 같던 추구는 그 당시 내가 추상표현주의에 매료되었던 가장 큰 이유일 터이다. 안고 있던 욕망이 추상적인 것이었으므로... 표현하고 싶던 그 무엇들이 추상적인 것이었으므로... 안소니 타피에의 힘찬 선과 자연을 상기시키는 그의 부라운과 엘로오커의 색조를 좋아했고 쟝 미쉘 바스키에의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거침없는 그의 뱃짱에 매료됐었다.
찌는 여름후의 서늘한 바람처럼 아이보리색조의 종이 위에 먹물처럼 스며드는 선으로 공간을 메우는 그림을 그리는 브라이스 마든이 편해지는 시절을 맞으며 이제 한국화나 서예에서 추구하는 선과 여백이 다가온다. 서양화냐 동양화냐 하는 것이 이제는 하나의 과정, 내지 도구이다. 결국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채움과 비움이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지는 것 과 같다. 바다가 더욱 푸르러 보인다. 짙푸른 바다나 회색의 바다나 요동치는 파도나 거울같이 말간 바다나 다 같은 것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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