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H의 수필집 ‘단순하게 조금 느리게’ 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빨리빨리’ 와 ‘후다닥’ 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저러다간 뒤쳐지기 십상이지, 라는 우려를 하게 되지만 그녀는 조금씩 느릿느릿 가서도 도착지점에 먼저 도달한 거북이 같고, 움직이는 것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느리지만 어느새 저만치 가고있는 달팽이 같다.
16살 이후로 30년 동안 여러 합병증을 동반한 관절염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그녀는 긴 세월동안 요리조리 깎이고 다듬어지고 씻겨지면서 기다림과 인내를 체득하고 그 깊이와 무게를 짐작할 수 없을 것 같은 따뜻한 영혼의 소유자로 거듭난 것 같아 보인다.
16살까지 자라준 키 이외에는 온갖 치료와 수차례 수술에도 불구하고 몸의 여러 부위들이 정상적이지 못하다.
손은 보통사람들의 반이 될까말까한 크기인데 엄지손가락들은 바깥으로 너무 휘었고 나머지들은 길이도 일정치 않고 한 방향으로 쏠려있으며 메추리 알을 살짝 쥔 것처럼 굽어져 있다.
기도를 할 때마다 맞잡는 그녀의 손은 금방이라도 부숴져버릴 듯 보드랍고 연약하다.
그 손으로 끊임없이 땡큐카드를 쓰고 어떤 모임의 공지사항을 알리는 수십장의 엽서를 쓰고 사람들을 위해 빵을 굽고 요리를 한다.
온전치 못한 그녀의 손은 항상 누군가를 위해 쓰여지려고 준비되어 있다. 내가 나를 위한 계획들로 바쁘게 종종걸음을 치고 있을 때 그녀는 조금씩 찬찬히 이 모든 것들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몇 해 전, 처음으로 둘이서 점심을 먹게 되었을 때, 내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며 한번은 정이 없으니 두 숟가락은 떠줘야 한다는 말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중국계 이민 3세인 그녀의 입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이 그 순간에 얼마나 나를 안심시키고 편하게 했었는지 모른다.
4년이 채 안되는 미국생활 후에, 다시 남편의 일 관계로 거진 3년의 서울살이를 하고 돌아온 직후라 그나마 조금 친해지려 했던 영어가 나 몰라라 하며 입안에서 꼬이고 머리 속에서 뒤엉퀴고 있었을 때, “내가 모국어인 영어를 잘 하는 것은 당연하다. 너는 한국어는 물론이고 영어까지 구사하니 나보다 낫다.
그러니 영어를 잘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없다. 내가 한국어를 못하는 게 더 미안하다.” 고 말하며 처진 내 어깨를 어루만져주었던 그녀다.
뼈들의 반란은 그녀의 다리와 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엄지발가락만 삐죽이 뻗어나와 있고 나머지는 거의 자라지도 못했고 한 방향으로 쏠려 겹쳐있는 모습이다. 신발은 꼬맹이 사이즈를 사 신어야 한다. 그래서 걸음을 빨리 걷지 못한다. 관절을 앓고 있는 새다리 같은 다리가 힘도 약하거니와 발가락의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라이드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장애인 라이센스를 붙인 빨간 지프를 몰아 기꺼이 그들의 발이 되어준다.
수시로 안약을 넣고 식사 때마다 여러 종류의 약들을 비타민과 함께 복용하는 것이 그녀의 일상사이듯, 그녀에겐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기위한 계획들을 세우고 준비하고 사랑을 키워가는 일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이다.
언제나 우리들과 밀착되어 있어 오히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지만, 단순한 일상의 기반이 없다면 ‘내일’이란 것도 없지 싶다.
급하게 흘러가고 있는 우리들 삶에 제동을 살짝 걸고 조금 단순하게 천천히 가다 보면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보이고, 느끼지 못했던 작지만 소중한 것들이 마음에 들어오게 되리라.
연약하고 느리고 서툴고 투박한 듯 보이지만 세상의 강하고 빠르고 매끄러운 어떤 것들보다 그녀는 당당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녀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중년의 삶을 나도 닮아가고 싶다.
성영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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