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스 의원 훈장받은 한국전 용사 마틴 마클리
한국전에 참전했던 마틴 마클리(75·풀러튼 거주)의 기억 속에 Outpost Harry 전투는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한 삶의 한 부분으로 각인되어 있다. 눈을 감으면 ‘수랑니’ 전투의 현장이 바로 어제 일어난 일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한국전 휴전협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6월10일 밤의 전투를 떠올리면서 그는 인자한 모습의 노인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육군대위(제3 보병대대)로 돌아갔다.
“‘수천명의 중공군이 공격하기 위해 집결할 것이다. K부대는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Harry기지를 사수하라’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Harry기지는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이곳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 서울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위기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6월5일 병사 전원에게 벙커 주변에 전선을 감고, 연료를 담은 통을 마련, 적의 공격에 대비할 것을 명령했다. K부대 소속 150여명의 병사들은 마침내 10일과 11일 양일간 눈앞에 널리 포진한 4,000여명의 대적과 그야말로 생사를 걸고 전투를 벌였다. 적막을 깨는 중공군의 나팔소리, 섬광처럼 어두움을 가르는 포탄, 병사들의 신음소리… 마클리는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전투에서 아군병사 60여명이 전사했으며 대다수가 큰 부상을 입었다고 회고했다.
벙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클리도 날아든 수류탄이 터지면서 두개골이 부서졌고, 눈은 밖으로 튀어나왔으며, 전신에 파편이 박히는 심한 부상과 함께 의식을 잃었다.
현재 그의 왼쪽 눈은 거의 실명상태로 단지 빛과 어두움을 구별할 뿐이며 팔꿈치 등에 통증을 느끼고 있다. 머리에는 두개골 수술에 사용된 금속판이 들어있어 공항에서 금속 탐지기를 통과할 때면 알람이 울리고 있다.
한국전이 발발한 50년 군에 입대한 마클리는 52년 다른 60명의 병사들과 캐나다 민간항공기를 타고 일본으로 날아갔으며, 배를 타고 한국 전선에 배치됐다. 이미 9개월간 전장에 투입됐기 때문에 전투에 참전할 필요가 없었던 그는 “전우애,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전투에 빠질 수 없었다”며 “군인으로서 임무를 다했을 뿐 나의 행동이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고 겸손해 했다.
에드 로이스 연방하원의원은 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지 50년이 경과한 지난 21일 한국전에서 보여준 용맹과 혁혁한 공을 인정, 그에게 청동성장(Bronze Star)을 수여했다.
〈황동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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