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참사가 채 잊혀지기도 전에 이스라엘에서 테러사태가 연속으로 일어나 어두운 지구촌을 더욱 어둠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중동사태는 어제오늘 터진 일도 아니고 더 이상 거론하기도 신물나는 일이지만 중동사태가 늘 종교문제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새삼 시사하는 바가 많다.
중동사태 못지 않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데 만만치 않게 부딪치는 것이 종교적 공해이다. 소위 믿음을 성취한 자들이 수양 속에서 자연스럽게 주위를 교화시켜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정쩡한 교리로 강요일변도의 이기적인 전도집단을 창출, 건전한 신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는 알려져 있듯 유일신 ‘야훼’를 섬기는 유대교를 뿌리로 하고 있다. 그러나 야훼의 모습은 성서적으로 여러 가지 모습으로 해석된다. 십계명 속에서는 율법의 신으로, 기독교에서는 신의 아들인 예수의 모습으로, 사도시대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습을 본 뜬, 즉 사랑(자비)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신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을 사랑의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신의 모습은 바로 예수를 닮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사랑(자비)을 행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표면적인 강조일 뿐, 사실상 기독교가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다.
인간이 아무리 사랑을 실천하고 도덕적인 자비심을 베풀어도 자신의 행실로서는 구원을 얻지 못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십자가를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못 박고 있다.
여기서 믿음이 강요되고 다음 단계인 열매(사랑의 행실)는 믿음의 예속물일 뿐이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그것은 전도(세확장)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크건 적건 간에 그들의 주장 속에 전도(세확장)의 열의가 깃들어 있다. 전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근래에 들어서 종교가 교리만을 내세우는 지나친 집단주의적 인간적인 요소에만 집착하는 현상을 보이게 만들었다. 어떠한 종교이든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실천되지 않는 종교는 다만 자신들의 감정, 자신들의 자아만족에 불과할 수 밖에 없다.
현대의 종교는 지금 구속사업(종교의 본질)이냐, 전도사업(세확장)이냐의 양자택일 기로에 서있다. 종교가 자신들의 이기심에서 벗어버리지 않는 한 종교를 통한 지구촌 평화 정착은 요원하기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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