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남편의 교통사고와 정신병원행, 그리고 이혼, 자신에게도 닥친 정신질환, 생의 포기….
소설 몇 권 안되는 삶이 어디 있을까마는 박정희씨(54. 여)의 이민생활은 그야말로 한편의 소설감이다. 그리 드라마틱하지않은, 아주 고단한….
80년 3월 19일. 서른 해도 벌써 넘은 그 쌀쌀했던 신춘의 오후를 박씨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불행의 서막은 남편의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부터 시작됐다. 페인팅 일을 하던 남편 박길환씨(59)가 운전하던 차량이 낭떠러지에서 굴러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척추가 부러진 중태였다.
“처음에는 곧 일어나겠지, 하며 조바심 반 기대 반 기다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반신불수였다. 그때 박씨의 나이 서른 셋.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고국을 떠나온 지 3년만에 청상과부가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들 하나, 딸 둘. 조막만한 자식들은 엄마만 쳐다봤고 벌어놓은 돈도 없었다. 당장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청소 일을 다녔다.
5년을 침대에 누워서 지내던 남편은 어느 날 손목의 동맥을 끊었다. 다행히 피가 멎었으나 병원에서는 정신착란 증세란 진단을 내렸다. 생활고와 병 수발에 지친 박씨가“대소변 받아내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하자 남편은 정신과 병동으로 옮겨졌다.
85년 무렵, 워싱턴한인봉사센터를 알게됐다. 이 단체의 주선으로 장애자를 위한 정부혜택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남편에게는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의
인우드(Inwood) 아파트가 제공됐고 병원비와 약값, 푸드 스탬프를 정부가 해결해주었다.
그 직전 두 사람은 15년여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장애인 남편이 사회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선 내 수입이 없어야 했었다"고 그는 말하지만 차마 말못할 사연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91년부터는 청소회사를 그만 두고 베데스다에 조그만 스낵바를 차렸다. 다행히 아이들도 잘 자라 주었다. 재혼을 권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흔들리기도 했다.
“괴로웠지만 딸 아이들에 상처가 될까봐, 그냥 얘들 커 가는 재미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절망은 어두운 곳만을 파고들었다. 97년 가게가 파산을 맞았다. 대학에 다니는 자식들 뒷바라지하고 나중에 팔아 노후생활 자금으로 쓸까했
던 애물단지였다. 그 참담함을 한 여인이 감당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는 일마다 안되고, 왜 이리 살아야하나 고민하다 모든 걸 포기했어요."
우울증이 생겨났다. 그리고 수시로 정신병원에 드나들었다. 희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올 2월‘망가진’ 어머니를 보다못한 막내 딸 카니(28)가 워싱턴 봉사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소셜워커인 송주섭씨가 상담을 위해 만난 박씨는“ 머리
카락은 박박 밀고 눈은 풀려있었으며 세상을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다.
봉사센터에서 정부의 저소득층 장애자를 위한 SSDI 프로그램을 알선해주었다. 박씨는 몽고메리 카운티에서 운영하는 장애자들을 위한 집에 입주했
다. 이곳에서 그는 매일 4시간씩 재활교육을 받고 있다.
“함께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들을 사귀니 우울증도 점차 가셨지요."
교회에도 처음으로 나갔다. 심신의 안정을 찾으면서 박씨는 어느덧‘새 사람’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지난 3일 워싱턴한인봉사센터 기금모금 만찬에 초청받아 사례보고까지 하게 됐다. 이 자리에는 그의 아들과 뉴욕에 사는 막내딸 부부도 다른
일정을 팽개치고 달려왔다. 장애를 딛고 일어서 화가가 된 전 남편 박길환씨도 휠체어를 타고와 전 아내의 재생을 가슴찡하게 지켜봤다.
그날 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었던 그들만의 불행을 떠올리며 박씨의 가족들은 북받치는 눈물을 엉엉 쏟아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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