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일을 하다보면 얼굴 모르는 사람들의 깊은 속내 이야기를 듣는 기회들이 있다. 미국생활에서 대개 가장 큰 아쉬움은 흉허물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막역한 친구이다. 고통으로, 갈등으로, 때로는 사랑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도 마땅히 말할 사람이 없을 때,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오는 독자들이 간혹 있다.
내게 전화를 해오는 독자들은 주로 여성이고, 대부분 한인인구가 빤한 소도시 거주자들이다. “한번 잘못 입을 열었다가는 온동네에 소문이 나거든요.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하네요”라고 말하는 그 독자들이 나를 편하게 여기는 이유는 물론 익명성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대상이니 무슨 이야기를 해도 뒤탈이 없겠다는 안도감에 그들은 때로 남편이나 자식들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최근 두세차례 같이 통화를 한 남가주의 50대 초반 여성은 ‘뒤늦은 사랑의 열병’을 가슴에 눌러둘 수가 없어 답답해 했다.
“이런 감정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고 보통 말하잖아요. 그런데 아닌 것 같아요. 이 나이에 주책스런 일이지만, 감정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랐어요”
그는 3년반전 남편을 사별하고 딸 하나를 키우며 반쯤은 죽은 듯이 살았다고 한다. 바깥출입도 안하고, 친구도 안만나고, 옷도 어두운 색깔만 입었다. 남편 아닌 다른 남자가 가슴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삶은 우울했고,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다 보니 체중만 늘었다.
그런데 얼마전 선배들이 주선한 맞선 비슷한 자리에서 한 남성을 만난후 그의 삶이 바뀌었다. 그 남성을 만나면서 “마음의 빗장이 소리도 없이 열려졌다”
빗장 열린 마음은 ‘늙음’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가던 나이를 180도 선회시켜 20대로 되돌려 놓으면서, ‘시간이 멈춰주었으면 하는 마음’‘나도 예뻐지고 싶다는 마음’, 그런가 하면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사막 한가운데를 헤매는 것 같은 마음’들을 두서없이 만들어내서 걷잡을 수가 없더라고 그는 말했다.
사람은 결국 자기 나이만큼의 이야기를 할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는데, 감정의 문제가 특히 그러하다. 젊어서는 나와 상관없다고 여겼던 나이, ‘어머니·아버지의 나이’ 혹은 ‘할머니·할아버지의 나이’로만 알던 40대, 50대, 60대가 내 나이가 되고 보면, 그 무미건조하고 밋밋해 보이던 감정의 영역에도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지를 비로소 알수가 있다.
“남편 떠난후 손자들 키워주며 자식들 뒷바라지만 하며 살면 자녀들은 좋아합니다. ‘우리 어머니같이 훌륭한 분이 없다’고 자랑을 하지요. 하지만 그건 자식들의 이기심일뿐 혼자 사는 어머니의 마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독자의 황량했던 감정의 벌판에 봄바람을 불어넣었던 사랑은 그러나 지속적 관계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로 인한 아픔이 크지만 수십년만에 찾아온 연애감정으로 삶이 생기를 얻었고, 생활태도가 적극적으로 바뀌었으니 잃은 것보다 얻은게 많다. “앞으로는 내 감정에 떳떳해하며, 감정에 충실하게 살겠다”고 그는 말했다.
장노년층의 ‘감정’을 없는 것으로 무시해도 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길어진 평균 수명과 흔해진 이혼으로 나이 들어 혼자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더 이상 재혼을 흉으로 여기는 풍토는 아니지만, 장노년층 이성교제에 대해 무언의 압박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이에 맞게 행동하라” “자식들 생각해서 품위를 지켜달라”거나 특히 여성의 경우, 혼자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나이든 싱글들을 속박하고 있다.
반면 연애감정은 60이 되어도, 70이 되어도 전혀 늙지 않는다는 것이 모두의 경험이다. 남편을 사별한 60대 초반의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하루중 하늘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황혼이지요. 나이 들어서 하는 연애는 황혼 같은 것입니다. 혼자 사는 여성들의 꿈은 모두 멋진 연애를 한번 해보는 것이지요”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쓸쓸한 마음들에 따뜻한 마음의 손님들이 많이 찾아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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