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아버지의 핏줄을 타고 태어난 자식이라면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무슨 예감이라도 있어야 당연하지 않을까? 그렇게 좋아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날 나는 머리가 아프지도 가슴이 두근거리지도 않았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그 날은 보통의 날이었다. 여고 동기모임에 가서 웃기도 하고 수다도 떨고 돌아온, 평소보다 조금 더 떠들썩한 하루였지 싶다. 그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내 아버지가 한국에서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 고명딸이라며 사랑을 독차지했던 나는 미국에서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아무리 먼 곳에 떨어져 각각의 삶을 살았다 해도 어찌 자식이 되어 그만한 눈치도 챌 수 없었는지.
동창회에 가서 친구들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입이 아프도록 지껄이고 실없는 농담도 남발하고 돌아온 날,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병원 영안실에 계시다." 울음도 안 섞인 차분한 목소리여서 믿어지지 않았다. 감정의 표현이 다양한 어머니는 목소리만 들어도 큰일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다. 마음의 상태가 표정과 음성에 그대로 나타난다. 반면 아버지는 침착하고 까다롭고 정확한 면이 엄마와는 딴 판이다. 엄마는 너무 기가 막혀 눈물도 안 난다고 했다. 교회에 가실 준비하느라 아침 일찍 일어나 양치하고 세수하고 틀니도 끼우고 로션까지 바른 후 어지러워 눕겠다고 하시더니 그 길로 돌아가신 아버지. 죽음을 맞는 모습도 성격대로가 아니었나 싶다.
급히 한국으로 떠나야 할 항공표를 알아보면서 나는 전화를 걸고 받기도 했다. 허둥대면서도 남편 위해 식탁을 차리고, 아이 위해 사과도 깎고, 내 머리칼도 염색했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게 없었다. 아버지를 도와 아버지를 기쁘게 할 일도, 속 썩여 책망 받을 일도... 나는 순간순간 멍했다가 서성거렸다가 했으나 남편과 아이는 금방 일상으로 돌아갔다. 신문보고 컴퓨터 켜고 숙제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세상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땅이 꺼지지도 하늘이 무너지지도 않았다.
빈소에는 아버지의 다정하고도 오랜 친구들이 여럿 다녀가셨다. 하루 전에도 만나 날이 풀리면 낚시 가기로 약속하셨다는 두 분의 친구는, 너무 서둘러 갔다며 노인들이 애들처럼 목놓아 우신다. 화환이 줄을 이어 밖에까지 차고 넘친다. 평소 꽃을 좋아하고 잘 가꾸던 아버지였지만 이제 와서 꽃이 무슨 소용이고 무슨 위로가 된단 말인가. 어리석게도 내 아버지만큼은 가족들을 다 이해시키고 나서 가실 만할 때 가실 줄 알았다. 적어도 우리 아버지는 이럴 분이 아닌데,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럴 수는 없는데. 허망하고 야속했다.
흙으로 빚어진 아버지는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 천사 같은 표정으로 깨끗하고 단정하게 가신 아버지는 천국으로 가셨을 것으로 확신한다. 신앙 갖기를 오랫동안 주저하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오랜 기도로 하나님을 영접하고 세례도 받으셨다. 세례 받는 날 지난날의 술 마시고 담배 피우던 일이 부끄럽다며 남모르게 세례 받기를 원했다는 순수한 아버지. 아버지를 좋은 천국으로 환송하면서도 우는 일밖에 할 수 없었던 나는 참으로 답답하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글 쓰는 일을 시작한 내게, 청탁 있을 때만 글 쓰지 말고 매일 매일 글 쓰기를 연습하라던 아버지의 조언이 아직 귀에 생생한데 아버지는 영영 가버렸다. 어버이 살아생전에 잘 하라는 어른들의 말이 피부에 닿는 듯이 실감난다. 아아 사랑하는 아버지는 갔지만 나는 아버지를 보내지 않았다. 부활의 아침엔 아버지가 꼭 다시 살아오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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