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버크에 거주하는 심득만(미국명 심준호 65세)씨는 지난 일요일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하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제는 기억에도 아득한 50년전 6.25당시 인민의용군에 자원입대한 형이 북쪽에 살아 있다는 소식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형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것으로 알고 살아 왔는데 그형이 살아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 동란의 와중에 행방불명된 형이 늘 가슴저린 기억으로 되살아 나곤 했는데 그 형이 살아 있었다니…"라며 말끝을 잇지 못하는 심씨는 주머니의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남북정상회담 합의사항에 따른 이산가족 상봉 계획에 의해 북측에서 통보한 이산가족 명단 200명 중에 심씨의 형 심종만(68세)씨가 부모와 형제 자매를 찾는다고, 전화가 한국의 동생들로부터 걸려왔을때도 믿기지 않았고 지금도 그야말로 ‘꿈인가 생시인가,하는 느낌이다.
전북 임실군 성수면이 고향인 심씨일가의 비극은 6.25전쟁이 시작되면서 부터. 선친 심길순씨가 성수면의 면장으로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하던 심씨일가였으나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 갔다. 전라도 시골마을까지 인민군이 점령하게 되면서 면장으로 재직하던 아버지가 반동분자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 전북 공립 중학교(현재 전주 북중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고 5남1녀중 맏이였던 형이 아버지의 석방에 도움이 될까 해서 인민군에 자원입대 했는데 그것으로 형과는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당시 중학교 2학년으로 전주 시내에서 형과 같이 하숙하며 지냈던 그가 기억하는 형의 모습은 늘 책을 옆에 끼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문학소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형이 그렇게도 살리고 싶어했던 아버지는 퇴각하던 인민군들에 의해 방공호에서 무차별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의용경찰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방공호에서 아버지와 함께 처형을 당했던 작은 아버지(심여순)는 총2발을 맞고도 기적적으로 생존, 3년전 작고하기 전까지 두고두고 먼저 간 형과 전쟁의 참혹함을 얘기했다.
졸지에 남편과 맏아들을 잃은 어머니 하정남씨도 몇 년 전 세상을 뜰 때까지 눈을 제대로 감지 못했다.
"우리같은 서민은 이데올로기니 반공, 용공같은 것 모릅니다. 그저 부모, 형제 찾아서 보고 싶을 때 보고, 왔다 갔다 하며 가까이서 안부라도 전하며 지내고 싶을 따름입니다. "
현재 귀국을 준비중인 심씨는 " 같은 땅덩어리위에 살고 있으면서도 50년을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이 땅에서 다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서는 안 될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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