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있는 형님이 50년만에 서울을 방문할지 모른다는 연락을 받고 눈물로 밤을 지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큰 형님을 6.25전쟁 통에 잃어버리고 둘째 형님은 북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에 돌아가실때가지 눈물이 마르지 않으셨던 어머님 생각이 왜 그렇게 나는지…"
‘ 북한 이산가족 방문신청자 명단’에 둘째 형 박섭(74세)씨가 들어있음을 확인한 박병규(67. 실버스프링 거주)씨는 감격의 눈물도 잠시, ‘상봉의 기쁨’을 누리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또 다른 이산가족이다.
"처음에는 지금 만나지 않으면 언제 볼 수 있겠는가 생각돼 비행기를 타고 가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꼭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갈 형편이 안된다고 생각하니 무거워지는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군요"
박씨가 형이 서울에 와도 만날 수 없는 이유는 3년전에 겪은 교통사고로 전신이 거의 마비된 중병을 앓고 있기 때문.
‘죽더라도 형을 만나고 죽겠다’며 고집을 부리던 박씨는 자신이 못만나는 안타까움을 부인과 막내 아들을 보내 대신할 생각이다.
6.25전쟁 당시 극단 ‘신향’의 배우였던 박씨의 둘째 형 박섭(병섭)씨는 인민배우 칭호를 받고 현재 번역영화제작소 소장을 맡고 있을 정도로 북한에서는 알아주는 인물.
"형님을 전쟁통에 마지막으로 본 것이 50년 9월, 연극 영화등 예술인들이 집단으로 모여있던 명동성당에서 였습니다. ‘며칠있다 집에 갈테니 걱정말고 부모님께 안부 전해라’는 것이 형님께 들었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헤어질 당시 병규씨는 17세, 형 섭씨는 24세 였다.
다행히도 병규씨는 지난 91년 미주 거주 이산가족으로 북한을 방문, 41년만에 만에 형 박섭씨를 만날 수 있었다.
병규씨가 형을 생사를 알게됐던 계기는 당시 동양식품점에 비치된 북한 비디오중 ‘임꺽정’을 빌려다 보다 출연진이 적힌 자막에 형과 같이 북한으로 간 형의 친구 이름을 찾으면서 시작됐다. 어렵사리 이 형의 친구와 연락이돼 그동안 잊혀졌던 형의 생사를 알게 됐다.
"한국에 있는 동생(병련)은 기억이 희미하겠지만 저는 형에 대한 기억들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지요. 당시에 형과 같이 활동하던 연극인들도 생각나구요. 형이 이번에 한국을 방문, 가족뿐 아니라 예전의 친구들과도 회포를 풀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서울 북아현동에서 4형제가 다정하게 지내던 옛일을 하나 둘 기억해내며 전쟁이 앗아간 ‘혈육의 정’에 가슴을 치는 병규씨의 모습은 이산가족의 아픔이 남과 북 만이 아니라 이곳 미주동포들에까지 이어지는 ‘한민족의 고통’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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