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들을 얼마간 돌보다 보면 죽음이 며칠 남지 않은 그들을 어느 정도 알아챌 수 있게 된다. 코마상태가 길어지는 경우엔 소변량이 현저히 줄어들고 몸이 붓거나 피부가 짙은 보라색을 띠기 시작한다. 가족이나 지인조차 찾아오지 않는 의식불명의 환자는 좀 더 빠르게 죽음이 찾아올 수 있다.
내 환자 중의 한 옆 방에 John이란 환자가 있었다. 그에게 새겨진 온몸의 문신이 실제로 튀어나와 날뛰며 그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아 처음 봤을 때는 나의 머리칼이 곤두서고 소름이 돋았다. 큰 키에 근육질 몸매의 30대 후반의 백인 남자. 숨은 쉬고 있었지만 뇌사상태여서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방에서 수액주사가 끝났다는 기계소리가 시끄럽게 연신 울렸으나 그의 간호사는 번번이 나타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내가 자주 들여다 보게 되었다. 며칠을 그렇게 보냈는데 그가 곧 이 세상을 떠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가족이나 연인이 자신을 찾아 주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간호사가 아니어서 병원에서 봉사하는 신부님이나 종교인을 요청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직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그의 방에 들어서자 사탄을 숭배하는 듯한 그의 문신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아주 잠시 인턴이나 레지던트가 문 턱에 있다 가버리고 아무 그림자조차 얼씬하지 않던 차에 생면부지의 나를 반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곧 이 세상을 떠날 그에게 집중할 일이다.
오랫동안 노동을 했는지 굳은 살이 오른 큼직한 손의 두툼한 손가락사이로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그의 손을 잡자 나도 모르게 그를 대신하는 기도가 흘러나왔다.
“지난 날의 잘못과 죄를 회개합니다.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영접합니다. 불쌍한 저를 받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러자 나의 긴장했던 마음이 스르르 얼음 녹듯이 풀리고 표정 없는 그가 평안해 보였다.
다음날 그의 방은 비어 있었다.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았다. 내 환자가 아닌 다른 환자차트를 보는 것은 금지사항이다. 확인하고 싶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참았다. 그와 이별은 이미 예상했던 것이다.
9년간 함께 한 숱한 환자와 황망해 하는 그들의 가족들을 대하는 경우, 위로조차 어렵고 눈물로도 모자라고 마음이 아팠다. 동성애자로 약중독으로 깨어나지 못하자 그의 간호사가 된 지 두시간 밖에 안된 내게 온갖 원망을 퍼붓던 젊은 누나의 표정. 추운 밤에 거리를 나가 헤매다 쓰러져 병원에 오게 된 노인에게 그의 딸이 찾아와 서로 욕설하며 저주하던 소리. 남편에게 화가 나서 자신의 오른쪽 귀 위에 권총을 쏴 얼굴이 축구공보다 더 부풀고 왼쪽 눈이 밤송이처럼 튀어나온 중년의 여인,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던 남편의 시선… 그 환자들과 가족들의 삶의 무게가 날 바닥으로 사정없이 짓눌렀다. 그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 고르기가 힘겨웠다. 그들 곁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함께 있기 위해 난 하나님의 옷자락을 세게 잡아당기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곁에 내가 먼저 쓰러져버릴 것 같았다. 그저 살아내는 일에 기도가 절실했다. 그러다 차츰 환자와 그 가족을 위한 기도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일도 있었다. 그런 날은 힘이 저절로 나고 하루를 지탱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John의 큰 손을 잡고 기도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의 영혼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을까. 그렇다면 다행이다. 가끔씩 그 순간을 떠올리며 그가 내게 남긴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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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희 워싱턴문인회,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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