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빛바랜 잎이 도르르 굴러 나무에서 떨어진다.
비가 지나간 후의 아침 공기는 더욱 스산하지만, 그 틈에서도 계절의 끝자락에 핀 고혹적인 국화의 자태가 곱다.
어느 동창이 미당의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누님같은 꽃’을 읊으며 곱고 아름답던 젊은 아내가 중년이 되어 장모님 얼굴이 보이더란 말에 한참을 웃었던 어느날 기억에 거울을 바라본다.
가을은 지나간 시간을 회상해보는 중년의 계절이 맞으니 국화앞에서 진정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시절을 생각해 본다.
햇살 아래에서만 꽃이 아름다운 줄 알았지만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꿋꿋이 피어난 가을꽃이 더 겸허하고 포근하며 따뜻하게 느껴진다.
봄에는 수선화와 벚꽃이, 여름에는 해바라기와 코스모스가 계절의 화려함으로 정원을 가득 메웠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장미의 화려함을 극찬했지만, 정작 마음을 적시는 것은 계절의 끝자락에 소담하게 피어난 가을꽃들이다.
롱아일랜드 공원을 걷다 보면 메리골드, 구절초, 개망초가 눈을 즐겁게 한다. 누가 돌보지 않아도 바람에 흩어진 씨앗이 땅을 찾아 산기슭과 들녁에도 심지어 길가에도 곱게 피어난다.
쑥부쟁이 같은 들꽃들도 한몫을 하며 걷는 내내 고운 풍경이 이어진다.
누렇게 빛나는 들판을 지나 오리들이 노니는 강가에는 억새가 높게 자라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맡기며 움직인다. 주어진 시간에 순응하듯 살아가는 우리들 같기도 하다.
오래전, 미국에서 살아내기 힘들던 젊은 시절에는 꽃을 사는 일을 사치라 여겼다. 생일이나 어머니 날에 건네주는 꽃 한 다발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아까워 다시는 사지 말라던 배고픈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마음에 빈자리가 많아질수록 곱게 피어난 꽃의 자태가 그립고 생활 속에서도 향기가 그 빈틈을 채워주니 이제는 꽃을 자주 사서 꽃병에 담아 보는 것을 즐긴다.
꽃을 꽃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이 마치 살아온 인생을 닮았음을 느낀다.
고운 꽃도 ‘화무십일홍’이라 열흘을 넘기지 못하지만, 그 시드는 과정이 서글프거나 허무하지 않다. 오히려 한 송이 피어난 꽃이 피고지는게 인생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 같아 꽃을 바라보는 마음이 그저 행복하고 흡족하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나이 들어간다는 건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꽃은 살아온 시간을 바라보는 인생이다. 이 가을이 붉게 물들어 차곡차곡 익어가는 풍경을 느끼며 서리 내리기 전, 진하게 핀 장미를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 계절을 마지막으로 소담하면서도 화려한 마음으로 가을을 만끽하고 하루하루를 잘 지내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야겠다. 지금 우리에겐 이 시간이 가장 젊은 화양연화가 될테니. 여전히 우리들 마음에 잔잔한 늦가을의 향기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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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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