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자유공원에는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다. 공원에 오르면 인천 시가지가 발아래 내려다보이고 멀리 서해안이 시야에 들어와서 좋다. 특히 해 질 녘이면 도시를 감싸주는 석양빛이 아름답다. 맥아더 장군 동상은 자유공원의 상징이기도 하다.
맥아더 장군은 오른손에 망원경을 들고 서해를 바라보고 서 있다. 아마도 인천상륙작전 당시 지휘관으로서 대한민국을 바라보던 모습을 담은 것 같다. 그것은 자유와 평화를 희망하는 상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동상이 세워진 것은 1957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기념해 건립되었고, 지금도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은 6·25 전쟁의 전세를 극적으로 뒤바꾼 역사적 군사작전으로,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에서 감행된 성공적인 작전이다. 이후로 전쟁의 흐름을 바꾸고 서울 수복의 발판을 마련한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에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뉴욕 리버티섬에 위치한 자유의 여신상을 방문하였다. 페리를 타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머리에 왕관을 쓰고, 오른손에는 횃불, 왼손에는 독립선언서를 꽉 잡고 있었다. 미국 독립 100주년이 되던 1876년에 프랑스 에펠탑의 설계자였던 에펠이 설계한 이 자유의 여신상은 그해 10월 28일에 세워졌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횃불은 자유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상징이라고 한다. 신천지의 꿈을 가슴에 안고 긴 항해 끝에 이 동상을 마주 보는 감격은 이민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에 넉넉했다.
인천에 살 때 자주 들렸던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이 떠 올랐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세상에 전하려는 모습에서 두 동상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 자유의 여신상이 철거 논쟁에 휘말렸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동상은 한 때 철거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특히 2천년대 초반에 심했다. 이때 이 동상을 미국 오리건주로 이전하자는 의견이 미국 내 한인 사회와 정치인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오리건주에서 5선의 경륜을 지닌 임용근 상원의원이 중심이 되었다. 이미 오리건주에는 한국전쟁 기념공원이 윌슨빌(Willsonville)시의 5에이커가 넘는 대지 위에 세워져 있었다. 한국전 참전 오리건 출신 전사자 287명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가 서 있는 곳이다.
그 후로 인천 맥아더 장군 동상의 이전은 실현되지는 못했댜. 하지만 그와 별도로 한미 우호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상징적 조형물로 맥아더 장군 동상이 제작되어 윌슨빌에서 2017년 6월 24일, 6·25 전쟁 67주년 기념행사에서 제막되었다. 이 동상은 미국 내 한인 사회와 참전용사들의 뜻을 모아 새롭게 건립된 독립 동상이다.
제막식에 맞추어 한국 정부는 참전용사 가족에게 ‘평화의 사도 메달’을 수여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이 공원은 단순한 추모 공간만 아니라, 한미동맹의 역사와 평화의 소중함을 미래 세대에게 전달하는 교육적 장소로도 소중하게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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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두 서북미수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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