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9년 봄, 조선 제8대 왕 예종이 즉위하자 한명회·신숙주 등 대신들은 사관들에게 세조실록 편찬을 위한 사초 제출을 명했다. 그런데 이때 처음 도입된 사초실명제가 문제였다. 대신들의 잘못을 가감 없이 적어온 종4품 사관 민수는 두려움에 떨었다. 결국 그는 사초를 몰래 빼내 수정했다가 발각되고 만다. 조선 최대의 사초 사건으로 꼽히는 ‘민수사옥’의 대가는 혹독했다. 예종의 세자 시절 교육 담당이었던 인연 덕분에 민수는 곤장을 맞고 관노로 전락하는 데 그쳤지만 춘추관 관리 두 명은 참형당하고 다른 두 명은 군졸로 강등됐다.
4964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을 남긴 ‘기록의 나라’ 조선에서도 권력자들은 기록 조작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세조·연산군·광해군처럼 정권의 정통성이 취약한 임금일수록 사초 수정의 시도가 잦았다. 현대에 들어서도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참사 보고 시각 변경, 노무현 정부의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삭제 사건 등이 발생했다. 미국에서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과 관련해 백악관 녹음테이프를 삭제·편집하다가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다.
최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이 브리핑 속기록을 수정해 구설에 올랐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발언에 대해 “원칙적으로 공감한다”고 했다가 논란이 일자 속기록에서 ‘공감’ 부분을 삭제했다. 기자단의 항의로 해당 내용을 다시 복원했지만 이미 신뢰는 훼손됐다.
대통령실 대변인은 대통령의 입이다. 대통령실 속기록은 회의나 정상회담뿐 아니라 각종 발언과 지시 사항까지 담아 공식 기록물로 관리된다. 군사정권을 끝내고 문민 시대를 연 김영삼 정부부터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고, 노무현 정부는 2007년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제정했다. 동서고금·좌우를 막론하고 권력자들은 기록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고치거나 아예 없애고 싶은 유혹에 시달려왔다. 하지만 기록을 바꾸는 것은 늘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결국 자신을 심판하게 마련이다.
<한영일 /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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