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숨지 않아, 당당히 빛날 거야(I’m done hidin’, now I’m shinin)’
벌써 4주째 ‘빌보드 핫100’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 ‘골든(GOLDEN)’ 가사의 한 대목이다. 국내 엔터테인먼트사의 연습생 출신 작곡가가 만들었다는 이 노래는 가사의 다른 구절처럼 ‘더 높이, 높이, 높이 날아오르고(We’re goin’ up, up, up)’ 있다. 어쩌면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케데헌의 인기 역시 폭발적이다. 올 6월 말 출시된 이 작품은 두 달여 만에 조회 수 2억 9000만 회를 돌파하며 ‘오징어 게임’을 넘어섰다. IBK투자증권은 케데헌의 지식재산권(IP) 가치를 1조 원 규모로 추산했다.
K팝 걸그룹이자 퇴마사인 ‘헌트릭스’가 비밀스럽게 악귀들과 싸우면서 팬들과 세상을 지키며 ‘혼문’을 완성시킨다는 현대판 ‘전설의 고향’ 같은 스토리에 전 세계가 열광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애니메이션 영화를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필자도 꽤 재밌게 관람했으니 젊은 층들의 열광은 당연해 보인다.
그렇게 놀라운 신드롬을 만들어낸 케데헌은 이제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의 산업을 ‘빛나게’ 하며 ‘날아오르게’ 하고 있다.
2017년 봄 이른바 ‘사드 사태’로 중국인 단체관광이 중단되면서 사라진 서울 남산 주변의 관광버스 불법 주차가 다시 시작됐다. 케데헌에 등장한 남산 서울타워에 방문하려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7월 서울 방문 외국인은 136만 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또 이들의 관심에 맞춰 서울관광재단은 지난달 말부터 ‘서울 트립 헌터스 스탬프 투어’를 운영했는데 투어 장소는 서울타워와 북촌 한옥마을, 낙산공원, 한강공원, 명동 거리 등 케데헌에 등장하는 곳들로 구성됐다. 이미 글로벌 먹거리로 떠오른 라면과 관련 기업들은 그야말로 펄펄 끓고 있다. ‘케데헌 한정판 신라면 세트’를 판매한 농심의 주가는 고공 행진하며 50만 원을 돌파했다. ‘라면을 넘어 문화 현상’이라는 ‘불닭볶음면’, 삼양식품의 주가는 160만 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의료관광객이 100만 명에 달했고 이들이 쓴 비용이 피부과와 성형외과를 중심으로 1조 2000억 원에 달하는데 케데헌에 한의원이 등장하면서 한방 수요까지 늘어나 올해 114만 명 돌파가 무난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오롯이 외국자본이 만들어낸 K콘텐츠의 어마 무시한 위력에 놀라는 한편으로 우리는 국가의 경쟁력이나 K산업의 안정적인 발전에는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무리들의 행태에 다시 놀라게 된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달 11일 ‘3대 특검’의 수사 기간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던 전날의 여야 원내대표 합의안을 파기했다. 그런데 이번 합의에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개편과 관련한 정부조직법 처리에 국민의힘이 협조하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번 파기로 국회 정무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는 야당이 돌아서 패스트트랙으로만 국회 문턱을 넘어야 하면 금융 감독 개편은 내년 4월까지 미뤄지게 된다. 강성 팬덤 ‘개딸’들의 협박에 무릎 꿇은 여권이 국가의 금융 산업 감독 체제 개편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수개월간 표류시켰다는 얘기다. 대한민국 정치가 국민과 국가를 ‘빛나게’ 만들어준 적이 없었음을 알아 큰 실망도 없지만 이렇게까지 발목을 잡아야 할까.
헌트릭스의 3인조 루미·미라·조이가 완성하려는 것은 ‘혼문’인데 이는 헌트릭스가 노래를 통해 관객과 진심으로 하나 될 때 만들어지는 감정과 연대의 힘이라고 한다. 그 혼문이 보호막이 돼 악귀를 막고 세상을 안전하게 지킨다는 아름다운 판타지다.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 헌트릭스는 나타날 수 있을까.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에서는 보수 단체 창립자가 피살되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고 같은 수준의 정치 양극화가 뿌리내리고 있는 한국에서 진심으로 국민의 안위만을 바라보며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그런 리더가 등장할 수 있을까.
어쩌면 답답한 현실 탓에 애니메이션의 판타지에 환호하고 있다는 생각도 스치며, ‘골든’의 가사 한 줄이 다시 꽂힌다. ‘우리는 함께라서 빛나고 있어, 우리는 황금빛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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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서울경제TV 보도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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