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3만8,000여㎞에 달하는 길고 긴 해안선을 보유한 나라다. 그럼에도 바다와 면한 북쪽과 동쪽으로는 사계절 얼지 않는 항구(부동항)가 부족해 애를 먹어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블라디보스토크 등 주요항 대부분은 혹한기에 쇄빙선 없이 무역을 하기 힘든 곳이다. 그나마 북해 유일 부동항 무르만스크, 크라노야르스키 지역 흑해 연안 도시들 덕분에 러시아는 해상 무역 숨통을 1년 내내 유지할 수 있는 정도다. 러시아가 개입한 근대 이후 전쟁사에서 늘 부동항, 그리고 여기로 이어지는 요지가 격전지로 등장해온 이유다.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활약해 유명해진 크림반도 남서쪽 끝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유서 깊은 부동항 격전지다. 19세기 중반 무역로 확보를 위해 남진하던 러시아는 이곳에서 오스만투르크 연합군과 오랜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패전한 러시아는 1856년 세바스토폴을 중립지로 내놔야 했다. 1905년 제정 붕괴의 단초라 할 만큼, 크림전쟁으로 명명된 이 전쟁 여파는 막대했다고 한다.
□ 소련이 해체된 후 우크라이나에 속했던 세바스토폴은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합병하면서 다시 부각됐다. 당시 러시아가 앞세운 합병 명목은 우크라이나 과도정부로부터 자국동포를 지키겠다는 것. 하지만 세바스토폴을 겨냥했던 러시아는 내심 부동항 등 무역로를 개척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는 서방을 견제하겠다는 의도였음이 분명했다. 이러한 야심은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끌어낸 불씨였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최근 우크라이나에 할양을 요구한 동부 돈바스는 마리우폴 등 흑해연안 무역항과 교통요지가 속한 도네츠크주를 포함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전 초입부터 러시아가 점령을 서둘렀던 지역이다. 푸틴이 계획대로 돈바스를 얻으면 이미 손에 쥔 크림반도와 함께 흑해 동북부 거의 전역을 세력권에 두게 된다. 21세기 들어 벌어진 부동항 쟁탈전 승자는 모두 러시아가 되는 셈이다. 서방과 맞설 푸틴의 단단한 성채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양홍주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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