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을 느끼는 방식’과 ‘행복을 표현하는 방식’

노르웨이 하면 피오르다.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셋은 모두 게르만계 언어, 루터교, 자연을 신처럼 대하는 정신을 공유한다. 정치적 투명성, 사회복지, 디자인 감각, 그리고 사색하는 커피 문화까지도 닮았다.
고요 속에서도 깊이 있는 세 나라는 인류에게 자연, 지혜, 평화를 선물한 빛나는 북구의 별들이다. 그러나 내면을 조금 들여다보면 깊은 악연도 남아 있다. 3국 중 노르웨이만이 단 한번도 제국이 되어본 적이 없으며 가장 한국과 비슷하다.
-노르웨이의 영광
우선 1380년 이후 500년간 덴마크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 후 190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100년을 스웨덴의 지배 아래 있었다. 산 하나 건너면 날씨와 사투리가 다르다. 저녁을 같이한 하이데거 씨는 말했다.
“1969년 북해에서 유전이 발견되기 전까지 우리는 항상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 아래 살아왔어요. 지금이 노르웨이 역사상 최고의 시대입니다.”
노르웨이는 매년 세계 행복보고서에서 상위권을 차지한다. 경제력, 복지, 교육, 치안, 청렴도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며,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까지 불린다. 오늘은 일년 중 해가 가장 긴 날이다. 새벽 2시 호텔 밖은 아직 밝지만 분위기는 전혀 밝지 않다.
-행복지수
행복지수는 높은데,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사실 행복지수란 “삶의 조건”이지 “감정의 표현”은 아니다. GDP, 복지, 수명 등 객관적 조건이다. 행복감은 주관적이고, 문화에 따라 표현 방식이 다르다. 북유럽 특유의 ‘얀테의 법칙’(Janteloven) - “너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들은 감정을 절제하고 겸손하게 표현하는 전통이 있어, 한인처럼 웃음을 크게 터뜨리거나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하는 식의 발언을 안 한다. 감정 표현이 차분하고 내면화되어 있어 외부인이 보기엔 무미건조하게 보인다. “행복은 웃음이 아니라 고요한 평화에서 온다”는 철학이 뿌리 깊고, 긴 겨울도 이유가 된다. 그러고 보니 지수와 조건에 민감한 우리는 진정 행복한지 의문이다.
노르웨이의 행복은
폭죽처럼 터지는 감정이 아닌,
피오르 위에 부는 바람처럼 조용히 흐르는 미소다.
비틀즈와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 숲
제프가 인생에서 첫 경험한 노르웨이는 사진도 글도 아닌 음악에서였다. 지금 제프는 노르웨이 버치나무 숲속에 갇혀 있다. 땅은 스펀지고 산은 병풍이며 하늘은 호수 안에 있다. 나무의 흰 껍질은 옛 상처처럼 벗겨져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날아간다. 고독이란 행복이 밀려온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 이 한 문장만으로 노르웨이를 설명해보자. 한 곡은 기타의 나무 향기, 한 편의 소설은 마음 깊은 곳의 고독한 숲이다.
비틀즈의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 - 나무 향기의 회상
존 레논의 낮고 쓸쓸한 목소리 위로 조지 해리슨의 기타 선율이 스며든다. 사랑의 기억을 나무 벽 안에 감춰두듯, 속삭이듯 노래한다.
“그녀는 나를 그녀의 방으로 데려갔고, 나는 그녀의 노르웨이산 나무 가구로 된 아늑한 공간에 앉았지. [중략] 아침이 밝기 전 그녀의 삶에서 사라졌지. 그래서 남겨진 침묵 속에서 노르웨이의 숲에 불을 지폈어.”
이것이 회한일지, 위트일지, 혹은 이별의 작은 복수인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일회적인, 그러나 영원히 잊히지 않는 순간을 나무의 따뜻한 색과 냄새로 감싸고 있다.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고독과 성장의 숲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 청춘의 상처와 상실,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난 사랑과 죽음의 이야기를 조용한 침묵의 숲으로 안내한다.
와타나베는 스무 살, 비틀즈의 음악이 흐르던 도쿄의 거리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나에코, 그리고 혼란을 안겨주는 미도리 사이를 오가며 청춘의 숲을 헤맨다. 그 숲은 단순히 사랑의 공간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거울이고, 고요한 나무들 사이로 들리는 타인의 고통이며, 영혼이 자라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장소다.
인생- 그 누구도 대신 걸어갈 수 없는 길
슬프지만 아름답고, 무겁지만 가볍게 읽히는 하루키의 문장들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는 숲이다. 그 누구도 대신 걸어갈 수 없는 길을 조용히 함께 걸어주는 벗이다. 일본인들이 하루키에게 걸었던 노벨문학상의 기대는 한강 작가에 의해 돌담 벽 무너지듯 무너졌다. 일본인들이 느끼는 고독 역시 노르웨이 백야에서의 고독과 유사하다. 그러나 홋카이도에 아무리 백설이 쌓여도 노르웨이 같은 빙하가 되지못하고 아무리 깊은 강도 피오르의 깊이를 따라갈 수 없다. 하나의 인생도 끝없이 용서를 구하는 여정이건만, 깊은 아픔을 안기고 용서를 구할 용량이 못되면 선진국도 아니다.
북반구 남성들이 동남아시아를 찾는 이유
와이프의 앙증맞은 작은 손을 잡고 걸어도 이 숲속에서는 고독이 가슴속에 밀려온다. 이곳은 6월말 한여름인데도 춥다. 찬비가 애절하게 매일 뿌린다. 방콕, 싱가포르, 발리의 해변과 작열하는 멕시코 태양이 그립다. 북반구 남성들이 동남아시아와 카리브해에 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날씨만 추운 것이 아니라 가슴도 차갑기 때문이고, 고독이란 긴 그림자가 노르웨이의 긴긴 터널들보다 더 길고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서정적이며 감성을 후벼파는 고독
두 “노르웨이의 숲”, 하나는 나무의 향기 속에서 이별을 담고, 하나는 나무의 고요함 속에서 삶을 되묻는다. 그 숲은 당신 안에도 있다. 비틀즈의 선율처럼 지나가는 기억의 나무들, 하루키의 문장처럼 조용히 속삭이는 질문들 - 그 속에서 우리는 자라고, 사랑하고, 어쩌면 다시 길을 잃기도 한다.
제프는 그 노르웨이 숲속을 걷고 있다. 서정적이며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고독과 고요가 거대한 자연 속에서 밀려온다. 발이 푹푹 빠지는 숲속에서 제프의 감성도 풀벌레와 계곡의 물소리, 그리고 높은 화강암 벽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같이 잠든다. <끝>
<글, 사진: 제프 안 Jahn20@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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