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님이 조계사 가는 길에 낙원시장 근처 떡집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떡을 보고 주인에게 돈을 건네면서 떡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주인은 손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곤 못 들은 척했다. 스님이 두 번 세 번 재촉하는데도 주인은 계속 외면했다. 당황한 스님은 가게 안을 살피다 벽에 걸린 십자가를 발견했다. ‘스님에겐 떡을 팔지 않겠다’는 기독교 신자의 뜻을 알아챈 그는 그냥 돌아섰다.
■ 종교 간 반목과 편견을 방치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스님은 주교님과 목사님을 찾아가 고민을 나눴다. 이어 불교 행사에 다른 종교인을 초청하고 자신도 성당과 교회에 나갔다. 이런 흐름이 이어져 1965년 10월 서울 광장동 용당산호텔에서 6대 종단 지도자의 첫 모임이 열렸다. 떡집에서 문전박대당한 이가 바로 능가 스님이고, 종교 화합의 뜻을 함께한 이가 노기남 주교와 강원용 목사다. 다종교사회인 우리나라가 화합의 모범 사례가 될 수 있었던 건 이런 노력 덕분이다.
■ 대한불교조계종은 2010년 성탄절부터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도 열었다. 이에 화답해 천주교와 기독교에서도 매년 부처님 오신 날 축하 메시지를 내왔다. 올해도 정순택 천주교 대주교가 불기 2569년 부처님 오신 날(5일)을 맞아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에게 “서로의 차이보다 공통된 가치를 먼저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을 때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이 더욱 깊이 실현될 것”이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앞서 진우스님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도 애도했다.
■ 서로 믿는 신과 세계관이 전혀 다른 종교도 이처럼 상대방을 존중하고 화합하며 산다. 그런데 나라와 국민을 위해 나섰다는 똑같은 목표를 가진 우리 정치인들은 상대방을 아예 인정조차 하지 않고 극단적 혐오와 적대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국민까지 갈라놓고 있다. 지지하는 당이 다르면 상종도 안 하는 세상이 됐다. 올해 부처님 오신 날 봉축 표어는 ‘세상에 평안을, 마음에 자비를’이다. 대선 후보들도 표를 얻으려고 절을 찾았다. 이들이 단 하루라도 평안하고 자비로운 정치를 보여주길 기대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일까.
<박일근 / 한국일보 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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