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나는 조선 실학자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깊이 빠진 적이 있다. 이는 연암이 청나라의 열하로 가며 겪은 에피소드와 사색을 기록한 여행기이다. 박지원이 묘사한 열하의 풍경, 수행원들과의 대화, 청석원을 둘러싼 국경에 대한 인식, 고구려 유적을 직접 마주한 감흥 등은 지금 읽어도 생생하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은 모두 한자로 쓰였다. 그 안에는 그의 조국에 대한 고민과 호탕한 정신이 한자의 형식을 빌어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이 책들은 연행단이 귀환하기 전 부터 이미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고려 시대의 문호 이규보가 남긴 동국이상국집 44권이 있다. 이 문헌은 동양에서 가장 방대한 문집으로 평가받는다. 그 안에는 삼국시대의 역사와 고려시대의 문화,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이 엄청난 유산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한자라는 이유로 이런 귀중한 문화유산이 외면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이해하고 익혀야 할 것은 한자의 복잡한 획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상과 감정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문해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그 원인이 한자를 잃어버린 데 있다면 어떨까? 우리 문학은 구비문학과 기록문학으로 나뉜다. 기록문학은 한문문학과 국문문학으로 구분된다. 요즘 우리는 한글문학에 주목하고, 한자문학은 ‘잃어버린 보물지도’처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상들이 남긴 귀중한 정신적 유산을 온전히 되찾기 위해서는 한자문학의 가치를 재조명해야 한다. 한자문학의 복원은 단순한 고전 연구가 아니라, 한국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국문문학에서도 한자의 흔적은 선명하다. 향찰은 우리 고유의 어순을 유지하면서 체언과 용언은 한자의 뜻을, 토씨와 어미는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했다. 이는 학창 시절 배웠던 제망매가 와 같이 삼국시대부터 우리의 사상과 정서를 고스란히 담은 독자적인 문학 장르인 향가로 발전하였다. 결국 향찰 문학은 한자를 빌린 차자문학이나 우리의 감정과 정체성을 표현한 국문문학의 한 갈래가 되었다.
이처럼 한자는 단순히 외래 문자나 고대의 언어가 아니다. 한자는 한국인의 정서와 역사가 녹아 있는 중요한 문화 코드다. 따라서 한국 문학의 범위를 확장하여, 한자를 기반으로 기록된 향찰 문학도 한국 문학에 포함된 것처럼,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코리안계 작가들이 각국의 언어로 쓰는 작품들까지도 또 다른 한국 문학으로 포함시키는 것을 적극 고려해 볼 일이다. 언어는 도구일 뿐,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정체성과 사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자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고서에 따르면 한자를 만든 이는 동이족 출신인 ‘창힐(倉?)’이라 한다. 한자의 기원이 우리 조상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우리가 한자를 다시 받아들이는 데 큰 자부심이 될 수 있다. 더불어 다음 세대와 함께 번역문학도 발전시켜, 수천 년 동안 축적된 한자문학, 그 보물지도를 되찾는 첫걸음을 함께 내디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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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 서북미문인협회 회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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